[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71>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30일 18시 51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이번에 우리는 3만 군사로 저들 56만을 쳐부수었소. 과인이 나서지 않는다 해도 저들 7만이면 풍비박산하여 쫓기는 유방을 잡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오. 거기다가 지난 한달 우리 서초(西楚)는 저것들의 분탕질에 큰 고초를 겪었소. 어서 팽성으로 돌아가 놀란 민심을 달래고 황폐해진 성안을 돌보아야 할 것이오. 하루 빨리 도둑맞은 곳간을 채우고 허물어진 성벽을 고치지 않으면 근거까지 위태롭게 되오. 천하를 노리는 자가 유방뿐만은 아니잖소?”

오히려 그렇게 범증을 달래 팽성으로 돌아갔다. 그런 패왕의 헤아림도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은 그 느슨한 추격이 한왕의 신속한 재기를 도운 셈이 되고 말았다.

한왕은 패왕이 직접 오지 않은데다 군사도 소문보다 적다는 말을 듣자 한시름 놓았다. 팽성에서와는 달리 이제는 풍(豊) 패(沛)의 맹장들이 모두 곁에 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머릿수로도 옹구와 하황(下黃)쪽에 나가 있는 조참과 관영이 형양으로 돌아오면 초군에게 별로 밀릴 게 없었다.

거기다가 한군의 기세를 더욱 높여준 것은 승상 소하(蕭何)가 관중(關中)에서 보낸 장정과 군량이었다. 소하는 한왕이 팽성에서 크게 지고 내쫓겼다는 소문을 듣자 평소 같으면 장부에서 빠질 늙은이와 어린 아이까지 군졸로 뽑아 우선 3만을 보내왔다. 군량도 오창의 곡식을 용도(甬道)로 날라올 때까지 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히 보내주었다.

한왕은 곧 소하에게 사자를 보내 그 공을 치하했다. 나중 일이지만, 소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한왕이 잃은 군사와 필요한 곡식을 관중에서 넉넉히 거둬 보냈다. 한왕은 그때마다 사자를 보내 소하의 공을 치하했는데, 어느 날 포(鮑)씨 성을 쓰는 어진 선비 하나가 소하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한왕이 햇볕에 그을리고 들판에서 지붕도 없이 자야 하는 고된 전쟁터에서도 여러 번 사자를 보내 그대를 치하하는 것은 오히려 그대를 의심하기 때문이오. 내가 헤아리기로는 그대의 자제들과 형제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자는 모두 싸움터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렇게 하면 한왕은 더욱 그대를 믿고 귀하게 여길 것이오.”

소하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선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정말로 한왕은 그전보다 더욱 소하를 믿고 귀하게 여겼다.

어쨌든 관중에서까지 장정을 보내오고 뒤이어 조참과 관영이 돌아오자 형양성의 한군 진영은 전에 없이 사기가 치솟았다. 한왕도 평소의 태평스러움과 여유를 되찾아 느긋하게 한신이 하는 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한신은 초나라 군사가 200리도 안되는 곡우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도 형양 성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사람을 풀어 적의 움직임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대장군은 다시 한번 성벽에 의지해 초군과 싸워볼 작정이시오?”

마침내 적이 50리 밖에 왔다는 전갈이 들은 한왕이 마침 군막으로 찾아든 한신에게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었다. 한신이 잘 물어 주었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이 형양성에 의지해야 할지 모릅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항왕도 오지 않고 군사도 우리가 많은데 농성(籠城)으로 궁색함을 자초할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밖으로 출격하여 우리만의 지리(地利)로 적의 예기를 꺾어 놓겠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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