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75>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2월 3일 18시 1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 항우는 한왕 유방에게 항복했다 되돌아온 왕들을 이전과 달리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모두 지난 죄를 묻지 않고 봉지(封地)를 되찾을 때까지 자신을 따라 싸우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제나라에서 도망쳐 온 제왕(齊王) 전가(田假)에게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무어라? 전가가 살아왔다고? 그럼 지난달 우리가 성양(城陽)성 문루(門樓)에 걸려 있던 걸 본 그 목은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처음 전가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 패왕은 알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기별을 전하러 온 근시가 전가에게 들은 대로 패왕에게 전했다.

“전횡(田橫)이 대왕과 우리 초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꺾으려고 못된 꾀를 쓴 것이라 합니다. 전가와 닮은 사람을 목 베어 대왕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자 전가를 들게 한 패왕은 성난 얼굴로 물었다.

“제왕은 그간 어디에 있었는가?”

“전횡의 무리에게 성양을 빼앗기고 대왕을 찾아 임치(臨淄)로 달려갔으나 도중에 길이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임치에 이르러 보니 그곳에는 아직 대왕의 위엄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위엄에 의지해 얼마간은 제왕(齊王)노릇을 할 수 있었으나, 대왕께서 팽성으로 돌아가시자 전횡의 무리가 그리로 달려와 더 견뎌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전가가 부끄러운 듯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패왕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과인은 성문 높이 내걸린 네 목을 보고 그 원수를 갚아주려고 보름이나 더 성양을 에워싸고 짓두들겼다. 그만한 날짜면 임치에도 소문은 갔을 터, 그런데도 명색 제나라 왕이라는 자가 임치에만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단 말이냐?”

“워낙 길은 천리나 되고 거느린 세력은 미미한데, 사방에 깔린 게 전횡의 무리라 감히 움직여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오직 대왕께서 신위(神威)를 떨치시어 제나라를 평정하고 임치를 구원해주시기만을 빌었습니다.”

전가가 더욱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패왕이 벌겋게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과인이 너를 세워 제왕으로 삼은 까닭은 제나라 왕손(王孫)인 네가 동족을 잘 다스려 너희 제나라가 과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 과인의 울타리가 되기는커녕 쥐새끼처럼 달아나 숨어 우리 군사들의 사기만 떨어뜨렸으니 그 죄가 작지 않다. 더군다나 너는 우리 군사들에게는 이미 한 달 전 성양의 성문 밖에 목이 내걸렸던 자이다.”

그러면서 전가를 끌어내 목 베게 했다.

“대왕께서는 항복하여 적을 따랐던 왕들까지 거두어 쓰시면서 끝까지 버틴 제왕에게는 어찌 그리 박하십니까? 그를 살려 다시 제나라를 거두어들일 때 앞장서도록 하신다면 적지 아니 보탬이 될 것입니다.”

범증이 그렇게 말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나라에서 겪은 어려움이 떠올라 모처럼 되살아난 자부심을 긁어댄 탓인지, 패왕이 부드득 이까지 갈며 말했다.

“제나라의 쥐새끼들이야말로 과인이 직접 달려가 처결해야할 것들이오. 이제 늙은 도적은 멀리 함곡관 밖으로 달아났으니 다시 제나라로 군사를 내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제나라로 쳐들어갈 군사를 일으킬 듯 범증의 허파를 뒤집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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