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실종’ 기관개입 확인땐 유신정권 도덕성 치명타

  • 입력 2005년 2월 4일 18시 14분


3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吳忠一 목사)가 선정한 조사대상 사건 7건 중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이 정치권의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의 비공식 라인이 개입한 납치 살인의 개연성이 있고 사건 발생 장소도 외국(프랑스 파리)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경우 폭발력은 엄청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건의 관련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김재규(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 박종규(朴鐘圭) 전 대통령경호실장 등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여부가 최대 쟁점이 될 전망이다.

만일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김형욱에 대한 납치나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부친의 부채와 자산을 모두 인수한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 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타난 당시 사건 관련자들의 엇갈리는 발언으로 미뤄볼 때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나 당시 정권의 직접적인 납치 살해 여부가 명쾌하게 밝혀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미국에 체류 중인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은 4일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정원에 관련 문서가 있었다면 내가 읽었을 텐데 못 읽었다”고 말했다.

당시 중정 총무국장이었던 이 전 원장은 “김형욱은 갱단에 의해 죽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추측을 내놓았다. 그는 추측의 근거를 묻자 “박종규가 워낙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서…”라고 말해 박 전 경호실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이는 중정 해외담당 차장이었던 윤일균(尹鎰均) 씨가 1998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욱과 관련해) 정상계선 조직에서는 지시를 받은 바도 없고 지시를 내린 일도 없다”며 중정 해외파트 차원의 공작 가능성을 부인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윤 씨는 “해외공작을 하려면 우리 해외 거점 파견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해외 정보업무는 나를 통해 지시가 나가는데 (당시에는) 나간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관련자들의 발언은 진실규명위가 국정원만을 조사대상으로 삼아서는 새로운 정보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더욱이 사건의 내막을 전해 들었거나 실종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송진섭(宋振燮) 경기 안산시장, 이상열(李相悅) 전 주이란 대사 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송 시장은 1979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 중 옆방에 투옥된 박선호(朴善浩) 전 중정 의전과장(사형)과 ‘통방(벽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는 것)’을 하던 중 “대통령경호실 간부들이 김형욱을 살해했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전 대사는 당시 중정 소속의 프랑스 공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실종사건의 진상에 가깝게 다가서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최호원 기자 bestiger@donga.com

▼김형욱실종 佛영토서 ‘작전’ 확인땐 파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은 ‘7대 의혹사건’ 중 상당수가 한국 영토가 아닌 타국 내에서 벌어졌다. 이 때문에 자칫 외교적 불씨를 건드릴 소지가 있다.

가장 폭발력이 큰 사건은 김형욱 실종사건. 여러 증언과 정황으로 미뤄볼 때 프랑스 영토 내에서 김 씨에 대해 정보기관의 ‘모종의 작업’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는 미제(未濟) 사건으로 분류돼 프랑스와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과거사 규명작업으로 정보기관의 공작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적지 않은 파문이 예상된다.

김대중 납치사건도 민감하긴 마찬가지. 정부는 사건이 발생했던 1973년,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하자 그해 11월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를 일본에 파견해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한국 정보기관의 개입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 지금도 정부는 개입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동백림 사건은 정보기관원이 독일과 프랑스 현지에서 관련자들을 직접 체포해 송환함으로써 외교 문제가 됐던 사건이다. 당시 독일 정부는 한국에 ‘주권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며 ‘구속자 원상복귀’를 요구하기도 했다.

한 중견 외교관은 “만약 한국 정부 관계자가 김형욱 씨를 프랑스에서 납치해 살해한 것이라면 명백히 프랑스 국내법을 어긴 것”이라며 “공소시효가 있어 법률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외교적으로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