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박명진]불리하면 원칙 바꾸는 지식인들

  • 입력 2005년 3월 3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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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원칙이 공공연히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같은 문제에 있어서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원칙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원칙들이 동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묵시적인 인정이라도 받으려면 일관성 있게 주장되고 적용돼야 한다.

정치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원칙의 흔들림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돼 있지만 지식인들에게서 그런 행태를 볼 때는 충격이 크다. 꾸준히 제기돼 온 방송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최근 있었던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둘러싼 논쟁 역시 정치적 전략을 위해 원칙을 무시해 버린 일부 지식인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였다.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이 영화가 10·26사태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이 영화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10·26사태에 대해 왜곡된 역사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기했다. 그러자 진보 진영임을 자처하는 일부 지식인들은 이 영화는 픽션일 뿐이며 어린 학생들도 현실과 픽션의 구분쯤은 할 수 있다는 반론을 폈다. 그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픽션이라고 해서 현실 인식이나 역사관 형성에 영향이 없는 것일까?

▼픽션은 역사인식과 무관?▼

문화 연구에 구성주의적 접근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문화와 관련된 담론을 생산하는 직종에 있는 사람치고 이 비판이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한 진보적 지식인치고 이런 방법론적 시각에서 문화현상을 해석하지 않는 경우도 드물다. 이 접근 방법에 의하면 우리의 사물 인식은 현실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어, 혹은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문화물은 그것이 픽션이건 뉴스나 다큐멘터리이건 우리의 세상 인식을 유도하고 구축해 낸다는 것이다. 진보 입장의 문화연구가들은 이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해 할리우드 영화의 패권적 시각은 물론 우리나라 방송 사극의 엘리트 중심적 역사관 등에 대해 많은 비판적 작업을 했다.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는 강한 현실 구성의 힘을 갖게 된다. 정치적 메시지를 정면에 내세우지 않은 블랙코미디 같은 오락물 스타일이기에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위해 그런 영화도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보다 일관성 있고 정직한 주장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쟁점이었던 검열 시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법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이 제기한 부친의 명예훼손에 대한 주장을 일리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큐멘터리 부분 삭제 후 상영’이나 ‘벌금을 감수한 전작 상영’ 중에서 택일하라고 판결하자 국가 권력에 의한 부당한 검열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부는 몇 년 전 영화 심의제도를 바꾸어 가위질을 불가능하게 하는 등급심의로 전환했다. 이는 청소년 보호와 명예훼손 문제가 사전 심의를 하지 않더라도 관련 실정법에 의해 다스려질 수 있다는 진보 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므로 그 영화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느냐 아니냐, 명예훼손의 혐의를 인정한다면 적절한 판결은 무엇이냐 등에 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어도 그것이 부당한 검열이라는 주장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명예훼손 판결이 검열?▼

원칙을 내세우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적용하고, 불리하면 눈감아 버리거나 논리를 왜곡시킨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닌 자의(恣意)가 된다. 이런 자의를 자행해온 것이 주로 독재 권력이었다. 민주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의적 방식에 의존하게 되면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독재 권력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잃게 될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 전략을 위해 원칙과 논리를 타락시키다보면 지식인 자신의 기반도 허물어져 내리지 않을까 염려된다.

박명진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학 mjin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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