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양기]신뢰로 이뤄낸 ‘韓日 역사교재’

  • 입력 2005년 3월 17일 18시 31분


한국과 일본의 최대 현안인 ‘역사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양국 정부는 ‘한일 역사공동위원회’를 2002년 발족시켰으나 아직 구체적인 성과는 없다. 성과를 올리려면 양국의 위원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부담을 떨치고 학자로서 역사적 사실을 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게 안 된 상황에서라면 위원회의 존재는 정치 ‘쇼’ 영역을 넘지 못할 것이다.

유행 현상은 숨이 짧다. 유행의 일종인 ‘한류 붐’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역사 마찰을 해결할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류와 ‘한일 우정의 해’ 이야기가 무성한 가운데 재임 중 역사문제에 언급하지 않겠다고 해 온 노무현 대통령이 올해 3·1절 기념식장에서 “보편적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6일에는 일본 시마네 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가결해 양국 관계에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다. 노 대통령은 시마네 현 움직임과 4월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 발표를 염두에 두고 이런 발언을 했을 것이다.

정부 주도의 역사공동위원회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히로시마 현 교직원 조합과 한국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13명의 멤버가 3년에 걸쳐 ‘한일 역사 부교재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이뤄 냈다. 4월 ‘한일 역사 부교재, 조선통신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서 우호로’(가제)가 양국에서 동시 출판(한길사와 아카시서점)돼 세간의 평을 기다리게 됐다.

▼양국교사 역사책 만들기▼

당초 근현대사를 대상으로 하려 했지만 짐이 버거워 도요토미의 ‘침공’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수호(修好) 회복’이라는, 전쟁과 평화가 전개되는 중세로 바꾸었다.

검토회의는 격돌 정체 진전을 거듭했다. 도쿠가와 정권이 조선 왕조와 수교할 무렵의 해석을 놓고 격돌했다. 명나라의 내란이 조일 수교 이유의 하나라는,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둘러싸고 대구지부 측 집필자들끼리 각기 다른 주장을 전개해 회의장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대구지부 측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히로시마 측은 마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양 단체의 조언자 입장에 있던 나는 “민족과 국가라는 부담을 갖지 말고, 한 사람의 교사로서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무얼 전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된다.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설은 필요 없다”며 늘 강조해 온 말을 했다. 이에 대구지부 측은 “그러면 친일파로 불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히로시마 측은 “우리들은 친한파로 몰린다”고 응수해 회의장에 폭소가 일었고 오히려 그 때문에 부드러운 분위기로 전환됐다. 각자 무의식 속에 민족과 국가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사회적 반향을 걱정했던 것 같다.

난관을 넘을 수 있었던 비결은 ‘신뢰’였다. 상대를 불신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대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마찰과 논쟁도 겁나지 않는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불신감을 씻어 내는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의견을 솔직히 서로 나누는 것이 좋다. 신뢰가 근저에 있다면 마찰과 싸움을 겁낼 게 없다고 나는 조언했고, 그게 결실을 보았다.

▼터놓고 얘기 불신감 씻어▼

이번 일을 계기로 근현대사 분야도 검토회의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3월 19일 한국에서 양국 집필자를 중심으로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대응 심포지엄-한일 역사 공동 인식 만들기’를 개최한다. 사회적 반향을 기대한다. 독일과 주변국이 ‘역사 마찰’에 대해 충분한 검토로 신뢰를 회복하고 역사인식을 공유했던 일을 덧붙이고 싶다.

김양기 일본 도코하가쿠인대 객원교수

▽이 글은 본보의 제휴지이자 일본의 대표적 정론지인 아사히신문에 동시 게재됩니다. 필자 김양기 교수는 193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로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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