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논술잡기]‘걸리버 여행기’…우리들의 모습 아닐까

  • 입력 2005년 3월 25일 16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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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571쪽·1만3000원·미래사

대입 논제를 처음 접한 학생들은 당황하기 일쑤다. 제시문의 수준은 고등학생의 눈높이보다 너무 높다. 도움이 될까 싶어 대학별 권장도서들을 뒤져 보지만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이 잣대로 삼는 책들은 교과서보다 한참 어렵다.

논술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독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논술의 소재가 되는 학술 고전들은 주장과 근거들이 이어지는 긴 논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책들은 독서 지구력이 없으면 따라가기 힘들다. 그렇다면 먼저 길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에 맛 들여 보자. 장편소설은 긴 호흡의 글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데 적당한 읽을거리다.

상징성이 뛰어나서 다양한 해석과 토론이 가능한 소설이면 더욱 좋겠다. 해석과 토론이란 결국 주장과 근거로 이루어진 논증들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감각을 익혀 간다면 어느덧 논술 제시문도 어렵지 않게 느껴질 터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이런 조건에 딱 맞는 읽을거리다. 우리에게 동화로 친숙한 이 책은 풍자소설의 백미(白眉)이기도 하다. 걸리버는 네 개의 나라를 여행한다. 소인국 릴리펏과 거인국 브롭딩낵,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와 말들의 나라 마인국.

나라 하나하나의 모습도 기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은유와 풍자는 더욱 놀랍다. 예컨대, 소인국 릴리펏은 36년째 이웃나라와 전쟁 중이다. 삶은 달걀을 먹을 때 뾰족한 끝부터 깨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란이 전쟁의 원인이란다. 소인국 사람들은 좀스러운 일들을 가지고도 거창하게 싸운다. 조금만 생각해 보자. 사소한 일에 목숨 걸며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은 소인국의 모습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는 학자들의 나라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색에 몰두한다. 그래서 대화를 하려면 하인들이 바람주머니로 두드려 감각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모든 일은 정교한 공식에 따라 설계되지만 하나같이 공허하고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이들이 지배하는 땅 밑 세상은 혼란과 오류투성이다. 뜬구름 잡는 이론에 맞추어 현실을 재단하는 관료와 학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스위프트의 풍자는 말들의 나라 마인국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인간은 ‘야후’라는 저열한 동물로 묘사된다. 야후들은 배가 부른데도 음식을 놓고 다투며, 아무데도 쓸모없는 빛나는 돌을 갖겠다고 서로 심하게 싸운다. 읽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덧 탐욕에 휘둘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심각한 성찰에 이르게 된다.

‘걸리버 여행기’는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동시에 읽을수록 그 의미가 더욱더 깊어지는 책이기도 하다. 동화에서부터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사색 수준을 끌어올리는 미덕을 갖춘 책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학교도서관 총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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