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18>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3월 29일 18시 4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오래잖아 남은 군사 2만을 모조리 끌고나온 한신이 수자기(帥字旗)를 앞세우고 조나라 진채 앞에 이르렀다. 자신이 거느린 군사보다 열배나 많은 대군이 굳건한 진채에 의지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으나 한신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조나라 진채 앞에 진세(陣勢)를 벌리고 북소리와 함성으로 적장을 불러냈다.

진문이 열리며 번쩍이는 갑주를 걸치고 백마에 높이 오른 진여가 조나라 장수들에게 둘러싸인 체 한껏 위엄을 부리며 나타났다. 한신이 말을 몰고 나가 진여에게 제법 군례까지 올리며 말을 걸었다.

“거기 나오시는 분이 조나라 승상이신 성안군(成安君)이시오?”

“그렇다. 너는 누구냐?”

진여가 한신을 알아보고서도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한신이 성내는 기색 없이 받았다.

“나는 한(漢) 좌승상(左丞相) 겸 대장군인 한(韓) 아무개라 하오. 우리 대왕의 명을 받고 특히 승상을 뵙기 위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왔소이다.”

하지만 일찍부터 천하의 현사(賢士)로 이름을 얻은 진여에게는 한신이 갑자기 출세한 더벅머리 서생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다 거느린 군사마저 한신이 거느린 군사의 열배나 되자 한신을 얕볼 대로 얕보았다.

“네가 바로 큰 칼을 차고도 장돌뱅이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다는 그 겁쟁이 한신이로구나. 명색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56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패왕의 3만 군에 으스러진 질그릇 꼴이 난 주제에 아직도 부끄러운 줄 모르느냐? 저번에는 애꿎은 관중(關中)의 장정 10여만을 죽여 수수(휴水)의 흐름을 막아놓더니, 이번에는 또 몇 만의 한군(漢軍)을 시체로 만들어 이 정형(井형) 어귀를 뒤덮으려느냐?”

그때 한신 곁에 있던 장이가 참지 못하고 나서 진여를 꾸짖었다.

“이놈 진여야, 네놈의 귀는 뚫리다 말았느냐? 어찌 팽성의 일만 듣고 안읍(安邑)이나 연여(閼與)의 일은 듣지 못했느냐? 위표를 안읍에서 사로잡아 한왕께 보내고 네 종놈 하열(夏說)을 연여에서 목 벤 것은 우리 대장군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이라도 된다고 하더냐?”

투구와 갑주에 쌓여 있어 얼른 장이를 알아보지 못했다가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장이를 알아본 진여가 그런 장이의 꾸짖음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 높여 맞받았다.

“수십 년 지기(知己)를 저버리고 패왕에게 빌붙어 입의 혀처럼 굴더니, 마침내는 제 임금을 내쫓고 상산왕(常山王)자리까지 얻어걸려 거들먹거리던 자로구나. 저는 천벌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나고 나라는 옛 주인에게 돌아갔으면, 물러나 숨어살며 뉘우침이 마땅하건만, 네 어찌 위인이 이리 비루하냐? 옛적에 네가 거두어 먹이던 장돌뱅이 유계(劉季) 밑에 들어 그 종노릇을 하며 남의 목숨까지 빌려 나를 속이려 들더니, 이제는 곧 목 없는 귀신이 될 저 더벅머리의 길잡이가 되었구나.”

서로를 물밑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사이라 알고 있는 허물도 많았다. 거기에다 수십 년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정이 변한 미움이다 보니 그 표독스럽기가 또 예사가 아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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