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나서 반장과 부반장 두 놈이 엉겨 붙어서 싸우기 시작했다. 자고로 불구경과 싸움구경은 신나는 거라 우리들은 자기도 모르게 빙 둘러싸고 응원을 해댔다. 선생님이 둘을 떼어 놓고서야 싸움은 끝이 났는데, 이놈들 싸운 이유가 가관이었다. 원인이 야구잠바 때문이었던 것이다.
반장은 ‘백인천 4번 대타자’가 버티고 있던 MBC 청룡팀, 부반장은 ‘오리궁둥이 김성한’이 속한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어린이 회원 모집 전에는 별 탈 없던 놈들이 어느 틈엔가 서로 다른 파란색 잠바와 빨간색 잠바를 입고 나타나서는 사사건건 싸우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실은 나도 둘이 싸우던 상황에서 반장 놈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는 김재박의 열혈팬이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단에서는 홍보를 위해 어린이회원을 모집했다. 다들 생각나는가? MBC 청룡,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회원들. 지금도 회원들에게 주던 물건의 디자인과 색깔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MBC 청룡은 파란 바탕에 청룡 그림이, OB 베어스는 검정과 하얀 바탕에 곰 그림이 각각 있는 모자와 잠바가 한 세트였다. 그 당시 국민학생 남자아이라면 누구랄 것 없이 부모님을 졸라 서울 잠실구장에 가서 그때 돈으로 5000원 정도를 내고 회원 가입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어린이 회원가입이 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동지의식과 적개심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길을 가다가도 나하고 똑같은 소속의 잠바를 보면 왠지 끈끈한 동지의식에 한 번 더 눈길을 돌렸고, 다른 색 잠바를 입은 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밑바닥부터 솟아오르는 경쟁심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니 슬슬 다른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옆집 형이 합기도를 배웠는데 그 형이 매일 입고 다니던 빨간색 위아래 ‘추리닝 운동복’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운동복 위에 합기도 도복을 끈으로 묶어서 딱 매고 나타나면 이거 장난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이 운동복을 내 식대로 재탄생시켰다. 옆줄이 없었는데 바지 바깥 솔기 쪽에 까만 줄을 넣었고 합기도 표시 대신 멋있는 한자를 가슴에 달았다. 남들이 보면 웃었을 것이다. 특별히 운동하는 놈도 아니면서 남들이 껄렁한 패션으로 여기던 운동복에 그렇게 공을 들였으니…. 그러나 나는 예감했다. 이런 운동복 세상이 올 줄 말이다.
지금도 나는 운동복을 즐겨 입는다. 영화 ‘신라의 달밤’ 때는 그 추억을 되살려 내가 맡은 ‘최기동’ 역의 옷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캐릭터가 되기 위해 영화 촬영 한 달 전부터 그 옷만 입고 다녔다.
○차승원은?
△1971년 6월 생 △성균관대 영상학과 휴학 △영화 ‘세기말’ ‘리베라메’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선생 김봉두’ ‘귀신이 산다’에 출연. 현재 조선시대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극 ‘혈의 누’(5월 4일 개봉) 촬영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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