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60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어떻게든 지우고 싶어 하는 일본 정부의 속내가 이번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예견된 ‘역사 왜곡’=교과서 검정의 최고 책임자인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문부과학상은 검정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망언을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그 수위를 높여 나갔다.
그는 지난해 11월 “일본의 역사교과서에서 군 위안부나 강제연행 같은 표현들이 줄어든 것은 정말 잘된 일”이라고 발언한 데 이어 올해 초에는 “일본은 자학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정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지난달 29일엔 교과서 기술의 기준이 되는 ‘학습지도요령’에 독도와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 섬)를 일본 영토로 명기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문부과학상은 120여 명의 검정위원을 위촉 임명하는 책임자. 그의 영향을 받은 검정위원들은 결국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묘사한 후소샤(扶桑社)판 공민교과서 내용을 ‘일본 고유의 영토’로 더욱 개악하게 했다.
교과서 검정이 한국 중국과의 최대 외교현안이라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이처럼 논란이 되는 인물을 담당 각료로 기용했다는 점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대일(對日) 발언을 직설적으로 비판해 물의를 빚은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상은 4년 전 문부과학상으로 후소샤판 역사왜곡 교과서에 검정을 내준 인물. 또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간사장 대리는 후소샤판 왜곡교과서를 만든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행사에 지지 메시지를 보내 전폭적인 지원을 다짐했다.
▽일본 정부, ‘일본은 더 이상 전범이 아니다’=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과거 역사에 대한 시각을 공식화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음 세대가 ‘전범(戰犯)의 후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국 역사에 자긍심을 갖도록 역사적 사실의 은폐 또는 왜곡 방침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재일 사학자인 강덕상(姜德相·73) 시가(滋賀)현립대 명예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의 군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세력이 일본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다”면서 이번 검정 결과를 일본 사회의 우경화 흐름과 연결지었다.
일본 내 양심세력의 견제 덕택에 과거사 기술에서 일종의 ‘제어판’ 역할을 해 온 ‘근린제국 조항’이 이번엔 거의 무시된 점도 우려되는 대목. 군 위안부의 존재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책임 소재를 애매하게 묘사하는 등 근린제국 조항은 거의 무시됐다.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는 마지막 장에 실은 편집자의 글에서 “일본은 최근 반세기 동안 방향을 잃고 지냈다. 경제 부흥을 성취하고 세계 유수의 강대국이 됐지만 패배의 상처를 씻지 못해 자신을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분명하게 갖는 것”이라고 밝혀 역사 왜곡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가늠케 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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