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으로 가자며 잡아끄는 아들을 뿌리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재만 남은 집터를 바라보던 노춘복(71·여) 씨는 “19세에 시집와 52년 동안 산 이 집은 내 인생의 전부”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5일 오후 강원 양양군 양양읍 사천리. 이날 강원 지역 산불로 폐허가 된 이 마을은 진화작업이 끝났지만 전쟁터처럼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다 타고 콘크리트만 남은 건물 위에 위성수신 안테나만 을씨년스럽게 달려있기도 했다.
이날 사천리 26가구 가운데 12가구가 화마(火魔) 속으로 사라졌다.
예부터 선비가 많이 산다고 해 사천리(士川里)로 불렸던 이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토박이 노인.
칠십 평생 살아온 집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린 김사덕(71) 씨는 “6·25전쟁 때도 아무 피해가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씨의 부인 양순봉(63) 씨는 “곡물 저장창고가 타버려 지난해 수확한 벼 100가마를 모두 날렸다. 당장 뭘 먹고 사느냐”며 검게 탄 벼를 만지작거렸다.
양 씨가 하루 종일 산속을 헤맨 끝에 이웃 마을에서 찾아온 어미 소는 주둥이가 그을리고 발굽도 빠진 상태였다.
이웃에 사는 김옥순(62·여) 씨는 “우리 소가 송아지를 낳을 예정인데 외양간이 다 타버려 새끼를 낳지 못하고 있다”며 “이러다 어미 소마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천리 이장인 최선모(51) 씨는 “아직까지 불씨가 여러 군데 남아 있어 오늘밤이 고비”라며 “다시 마을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밤이 깊어지자 보금자리를 잃은 노인들이 잿더미로 변한 집을 떠나 마을회관이나 이웃집으로 지친 몸을 옮겼다.
양양=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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