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30>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12일 18시 2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신의 본대가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위나라를 평정하면서 형양 성고 오창을 둘러싼 초나라 군사의 압력은 드러나게 줄었다. 위나라로 진출한 한신의 부대가 언제 형양에 있는 한나라 군사들과 호응해 앞뒤에서 초군(楚軍)을 협공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 한군의 방어력은 한신이 이끌고 간만큼 줄어든 셈이었으나 초나라 군사들은 전처럼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한신이 조나라와 연나라를 치겠다며 군사 3만 명을 더 청했을 때 한왕이 선뜻 들어줄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묘하게 달라진 전국(戰局)의 양상 때문이었다. 때로는 한군데 더 전단(戰端)을 여는 것이 자신의 전력(戰力)을 품고만 있기보다 지키는 효과가 크다는 것을 느껴본 터라, 장이까지 붙여 3만 명을 떼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효과도 그랬다.

한신과 장이가 하열(何說)을 죽이고 대(代)나라까지 평정하자 형양 부근의 초나라 군사들은 더욱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조나라까지 평정하자 이제 초군은 서쪽으로 밀고들 뜻이 없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홍구(鴻溝) 동쪽에만 머물러 있었다. 광무산을 지키는 번쾌도 더는 위급을 전해오지 않았고, 오창과 형양 사이를 잇는 용도(甬道)를 지키는 주발도 원병을 청하는 일이 뜸해졌다.

“항왕은 어디 있는 거요? 팽성을 떠난 게 언젠데 아직도 형양으로 오지 않고 애꿎은 장수들만 몰아대고 있소?”

패왕 항우가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자 궁금해진 한왕 유방이 장량과 진평을 불러놓고 그렇게 물었다. 한왕은 진작부터 그들이 사방에 사람을 풀어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량이 희미한 웃음과 더불어 대꾸했다.

“나름으로 호기를 노린다고 하다가 오히려 때를 놓쳐 허둥대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듣기로, 항왕은 조나라가 우리에게 떨어졌다는 말을 듣자 군사를 동북쪽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다고 합니다.”

“듣자하니 항왕은 대량까지 와 있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북쪽으로 간다는 거요?”

“조나라는 항왕에게는 뜻 깊은 땅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항왕을 있게 한 것은 거록(鉅鹿)의 싸움 아니겠습니까? 5만 군사로 왕리(王離)의 20만 대군을 맞아, 아홉 번을 싸워 아홉 번을 모두 이기고, 왕리를 비롯한 진나라의 상장군 셋을 죽이거나 사로잡음으로써 오늘날 천하가 그 이름만 듣고도 떠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의 길을 닦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구한 조나라를 우리 한나라에 넘겨 등 뒤에 둔 채, 바로 형양으로 밀고 들어 대왕과 결판을 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진평이 자신이 헤아린 바를 말했다. 그 말을 듣자 한왕은 다시 한번 달라져도 크게 달라진 싸움의 양상을 떠올렸다.

(정말 달라졌다. 이제는 그도 서북쪽에 있는 나를 치기 위해 동북쪽으로 군사를 내려하는 구나.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정병(精兵)과 용장(勇將)으로 싸움마당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갈라지는 한판 전투가 아니라, 우리 손에 든 땅과 물자와 사람을 모두 움직여 마지막 승리까지 한계단 한계단 딛고 올라가야 하는 길고 힘든 행정(行程)이로구나….)

한왕이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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