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35>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18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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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구강왕 경포(경布)는 진승과 오광을 따라 봉기하여 진나라에 맞서기 전까지는 범죄자와 죄수의 우두머리로서 더 많이 알려졌다. 영포(英布)란 이름을 두고도 경포라고 불리는 것부터가 죄를 짓고 얼굴에 먹자를 새기는 형(경·경)을 받은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는 죄수로서 여산(驪山)에서 시황제의 황릉(皇陵) 만드는 일을 했고, 뒷날에는 무리를 이끌고 장강(長江)에서 떼도둑의 우두머리 노릇까지 했다.

한나라 사자로 온 수하(隨何)를 만났을 때 경포는 구강왕이 된 지 벌써 이태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무리를 이끌고 진나라와 맞서 싸운 지는 이미 여러 해 되었으며, 특히 항량과 항우를 따라 싸우면서부터는 장수로서 크게 이름을 떨치기도 했으나, 몸에 밴 이력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얼굴을 시퍼렇게 덮고 있는 먹실 글씨(묵자·墨字)는 처음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데마저 있었다.

하지만 경포는 자신의 그런 용모에 별로 마음 쓰지 않았을 뿐더러, 때로는 그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걸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다. 특히 소년 시절 어떤 용한 관상가(觀相家)로부터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되겠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얼굴을 뒤덮고 있는 먹실 글씨는 되레 드러내놓고 자랑으로 삼았다.

그날도 수하를 불러들인 경포는 먼저 보는 사람들마다 두려워 떠는 자신의 용모로 수하를 위압하려 했다. 먹실로 뜬 글자 때문에 검푸른 얼굴에다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두 눈으로 가만히 수하를 내려다볼 뿐 얼른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수하는 조금도 움츠러든 기색이 없었다.

“한왕께서는 신을 보내실 때 엄중한 서신을 내리시며 삼가 대왕께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하오나 신은 그 서신을 대왕께 바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구강왕 경포에게 사자로서의 예를 올리기 바쁘게 수하가 그렇게 말했다. 경포가 그제야 무쇠솥 깨지는 듯한 소리로 수하의 말을 받았다.

“궁금한 게 무엇인지 말하라.”

“대왕께서는 초나라와 어떤 연분을 맺고 계십니까?”

그 물음에 힐끗 수하를 쏘아본 경포가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 말했다.

“과인은 북향(北向)하여 초나라 임금을 섬기는 한낱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 연분이란 당치도 않은 소리.”

말할 것도 없이 수하를 떠보기 위해 그저 해보는 소리였다. 수하가 그런 경포를 똑바로 올려보며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항왕(項王)과 함께 앞장서 포악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신 뒤로, 구강왕이 되어 항왕과 나란히 제후의 줄(열·列)에 서시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대왕께서 구차하게 북쪽으로 돌아앉아 신하로서 항왕을 섬기는 까닭은 틀림없이 초나라가 강하다 여겨 거기에다 대왕의 나라를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믿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보기에 대왕께서는 결코 그리 믿지는 않으신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경포가 별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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