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39>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22일 18시 2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여봐라. 저기 저 자의 목을 베어 항우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으로 내 목숨이 붙어서는 다시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으리라는 다짐에 갈음한다 하여라.”

그리하여 그날로 초나라 사자는 목만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가고, 구강왕 경포는 한왕 편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 뒤 구강왕 경포의 움직임은 수하가 바란 것보다 훨씬 빠르고도 매서웠다. 다음 날로 군사를 일으키는데, 미리 채비하고 있기라도 했던 듯 사흘도 안돼 구강 성밖 들판은 날래고 사나운 군사들로 가득 찼다. 오래된 생강이 맵다더니, 한왕의 생각을 헤아리는 데도 경포의 나이와 이력이 헛되지 않았다.

“사자는 과인이 사자와 함께 먼저 한왕을 뵈러 가기를 바라는 듯하나, 지금 빈손으로 한왕을 찾아가 봤자 무엇하겠소? 그러지 말고 우리 먼저 산동으로 치고 들어 패왕의 기력을 흩어놓는 일부터 해봅시다. 그리되면 사자가 말한 대로, 한왕께서는 마음 놓고 관동을 경략하여 패왕과 천하를 다투는 데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오. 과인이 한왕을 찾아뵙는 일은 그 뒤라도 늦지 않소.”

그러면서 군사를 동북으로 몰아갔다. 수하도 그런 경포의 말을 옳게 여겨 두말없이 따라갔다.

경포가 한편이라 여겨서 그랬는지 구강과 이어진 서초의 땅은 지키는 군사가 별로 없었다.

회수(淮水)를 건너 무인지경 가듯 달려간 경포의 군사들이 기현((근,기)縣)에 이른 것은 구강을 떠난 지 사흘 만이었다. 그래도 현성(縣城)이라 기현 성안에는 많지 않은 군사와 더불어 제법 이름난 수장(戍將)까지 있었다. 하지만 구강왕 경포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오자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기현 다음으로 이틀 뒤에 이른 상현(相縣)에서는 달랐다. 구강에서 초나라 사자의 목 잘린 머리를 지고 가던 초나라 이졸(吏卒) 하나가 하루 전에 그곳에 이르러 경포가 패왕에게서 등을 돌렸음을 알린 까닭이었다. 수장 항규(項圭)는 사람을 팽성으로 보내 위급을 알리게 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백성들을 성벽 위로 끌어내 싸울 채비를 했다.

“성안 군민(軍民)들은 들어라. 과인이 몸소 구강의 매섭고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왔으니 어서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다가 성이 무너지는 날에는 옥과 돌이 함께 불에 타 없어지는 꼴이 날 것이다.”

경포가 문루(門樓)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가 그렇게 겁을 주어보았으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화살 비뿐이었다.

“좋다. 정히 그렇다면 무서운 것이 저희 임금뿐만이 아님을 성안 군민들에게 보여주어라!”

성난 경포가 먹 글씨(자자·刺字)가 새겨져 험한 얼굴을 더욱 험상궂게 찡그리며 소리쳤다. 이에 경포의 장졸들이 가진 힘을 다해 성을 들이치니 팽성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성이 오래 견뎌낼 수 없었다.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상성(相城)은 구강왕 경포의 손에 떨어졌다.

“팽성을 돌아 바로 제나라로 밀고 든다. 율(栗) 탕(탕) 하읍(下邑)을 지나 한왕의 고향인 풍(豊) 패(沛)의 땅을 휩쓸어 버리면 항왕과 서초 사이는 절로 길이 끊기고 만다.”

경포는 다시 율현(栗縣)으로 군사를 몰아가면서 그렇게 제 속을 드러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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