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이에 대항해 일본은 ‘탈아입미(脫亞入美)’로 방향을 정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과 일본의 이런 포석을 반영해 새로운 역사해석이 등장했다.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속셈을 드러냈고 일본은 역사교과서의 우경화를 통해 속내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에게 과연 21세기 한반도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사해석과 교육이 있는가. 외세에 대항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로부터 분출되는 역사에 대한 열정은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고양시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필자는 외세가 우리 역사를 건드리지 않으면 역사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우리나라의 풍토가 일본 우익이 지지하는 왜곡된 역사교과서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아무래도 한국 역사학 내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사교과서에 내재하는 민족주의가 외부의 자극과 충격을 에너지원으로 해서 안주하는 제도권 역사교육의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최근 한국의 국정교과서인 중학교 국사와 일본 후소샤 교과서를 비교해 읽어 보고 너무나 놀랐다. 많은 사람이 일본 교과서의 폐쇄성과 자국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후소샤 교과서 서문에 단 두 번 나오는 ‘우리’라는 단어가 한국의 국사교과서 머리말 두 쪽에 무려 스물한 번이나 나오는 것이 아닌가.
교과 편제상으로도 일본의 경우 일본사와 세계사가 하나의 ‘역사영역’으로 통합돼 있어 ‘세계 속의 일본사’는 물론, 일본인의 눈으로 보는 세계사인 ‘일본 속의 세계사’를 가르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육은 일본의 미래를 이끄는 조타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경우 국사는 독립 과목이지만 세계사는 사회과목에 포함된 채 서로 분리됨으로써 양자를 상호 관련성 속에 가르칠 수 없게 돼 있다.
일본 교과서를 비판하는 것으로 우리 역사교육의 목표가 달성될 수는 없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라는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이에 대해 정치논쟁이 아니라 역사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이런 역사담론 투쟁의 장은 국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사이고 세계사다.
한국사를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자 기록’이라고 정의하는 국사교과서의 시각으로는 그런 담론투쟁을 벌일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역사의 설명대상이지 한국사의 선험적 주체가 아니다. 전근대사는 우리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을, 근현대사는 우리 민족의 시련과 성장의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 전근대에서는 동아시아, 그리고 근현대에서는 세계를 무대로 해서 우리 역사가 전개됐다.
‘국사’가 아니라 ‘세계 속의 한국사’를 서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사와 세계사를 하나의 ‘역사과’로 묶어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이제는 어디에 대항하기 위한 역사 연구기관이나 재단이 아닌 우리 역사 에너지를 자가 발전시킬 수 있는 센터로서 역사교육과 연구를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연구소가 필요하다. 역사교육은 역사학의 식민지가 아니며 역사교육 없는 역사학은 그 존재이유마저 상실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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