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남성들은 그동안 치밀어오는 패션 욕구를 드러내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삼성패션연구소는 최근 서울 대구 부산 등 6개 도시 10∼50대 한국 남성 700명을 대상으로 패션 감성을 조사 분류한 ‘남성 소비자 감성 세분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패션 감성은 ‘로맨틱 초보 직장인’ ‘온화한 중소기업 사장’ ‘철부지 중학생’ ‘피곤한 장년’ ‘모던하고 편안한 코보스’ ‘화려한 중년 신사’ ‘개성 강한 N세대 활동가’ ‘모던 마초 부장’ 등 8가지로 나뉜다.
이 8가지 유형은 비슷한 성향끼리 묶여 다시 네 그룹으로 나뉜다. 패션 중도형, 패션 무관심형, 패션 얼리 어댑터, 패션 액티브 등이다.
당신의 남편이나 애인이 어떤 패션 감성을 지녔는지, 프런트 페이지의 일러스트레이션부터 확인해보자.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당신의 40대 남편이 알고 보니 ‘철부지 중학생’ 타입일 수 있다.
남성들이여. 이젠 자신 만의 패션 감성에 촉각을 세워라. 패션에 무관심한 남성들을 이제는 남성도 여성도 너그럽게 보지 않는다. 남성의 패션 감성은 생존의 문제다.
○ 패션 감성의 4가지 유형
삼성패션연구소는 8가지 패션 감성 유형을 비슷한 성향끼리 두 개씩 묶어 다시 크게 4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에는 연령 차이에 따라 두 유형이 공존한다.
:그룹 1=패션 중도형:
패션에 민감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은 중도 성향을 가졌다. 의류 구입에 큰돈을 지출하지 않고 어느 정도 체면을 유지하려 한다. 유행에 맞춰 옷을 구매하지 않고 캐주얼도 선호하지 않는다.
▽로맨틱 초보 직장인=20대 후반의 초보 직장인들로, 이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높다. 유명인이나 광고를 통해 알려진 제품을 선호한다.
▽온화한 중소기업 사장=40대 이상 중장년층으로 소득 수준이 비교적 높은 자영업자들이 많고,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추구한다. 그러나 싼 옷을 여러 벌 구입한다.
:그룹 2=패션 무관심형:
전통적 남성상에 치우친 패션 무관심형. 패션을 여성의 전유물로 보기 때문에 관심이 아예 없다. 여성적인 이미지와 화려하고 섹시한 이미지를 모두 싫어한다.
▽철부지 중학생=아직까지 부모가 옷을 사 주는 대다수 중고교 남학생들로 또래집단 사이에서 무난한 저가 캐주얼 스타일에 만족한다.
▽피곤한 장년=평균 연령대가 50.1세로 조사 그룹 중 나이가 가장 많다. 은퇴한 장노년층으로 매력도가 떨어진다.
:그룹 3=패션 얼리 어댑터(Early Adaptor):
모든 패션 이미지에 대해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모던하고 편안한 ‘코보스’(코리언 보보스)=20대 후반∼30대 후반으로 월 평균 가구 소득이 300만 원 이상인 사무 기술직이 대부분이다. 주로 서울에 거주하며 크게 꾸미지 않으면서 세련된 이미지를 선호한다. 유행에 민감하고 쇼핑 자체를 즐긴다. 유명 브랜드라고 해서 무작정 추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과 기호에 맞는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한다.
▽화려한 중년 신사=‘모던하고 편안한 코보스’보다 더 로맨틱하고 격식을 갖춘 스타일을 선호하는 멋쟁이 중년이다. 전문직의 비중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으며 월평균 소득도 가장 높다. 복잡하고 힘든 쇼핑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로 백화점에 들러 원스톱 쇼핑을 한다. 인터넷 등 통신 판매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그룹 4=패션 액티브:
전체 남성 중 절반이 넘을 정도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강한 남성성과 모던함을 추구하는 활동가 집단으로, 여성스러움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낮다.
▽개성 강한 N세대 활동가=자신을 위한 지출을 아끼지 않으며 활동적인 스포츠를 즐긴다. 합리적 쇼핑 성향을 가지고 있어 충동 구매하지 않는다.
▽모던 마초 부장=40대 초반 직장인들로 안정적 수입을 갖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최신 테크놀로지와 문화를 쉽게 접하고 받아들인다. 발빠른 트렌드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패셔너블하고 세련된 남자로 보이기를 원하는 욕구가 강하다.
○ 그러면 나는 어떤 유형일까
▽대학교수 이모 씨=‘로맨틱 초보 직장인’과 ‘철부지 중학생’의 혼합형.
서울에 사는 대학교수 이모(34) 씨는 자신의 옷을 직접 사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울산이 고향인 그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홀로 살 때에도 어머니가 소포로 부쳐 오는 옷을 입었다. 결혼한 후에는 아예 옷을 사지 않고, 장인 또는 후배가 주는 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입는다. 그의 친구 중에는 고향에서 보내온 사각 트렁크 팬티가 여름 반바지인 줄 알고 일주일 내내 입고 다녔던 패션 무관심형도 있다.
이 씨는 학생들에게 깔끔해 보이고 싶은 욕구는 있다. 멋을 부린다기보다 지저분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주로 면 바지와 버튼다운 남방을 입는다.
패션과 외모에 관심이 많은 ‘메트로섹슈얼’을 보면 ‘날티 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귀를 뚫거나 머리 염색을 하고 싶을 때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익명성이 보장될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광고대행사 간부 이상훈 씨=‘모던한 마초 부장’과 ‘화려한 중년 신사’의 혼합형.
광고대행사 간부인 이상훈(41) 씨는 트렌드의 변화에 눈과 귀를 열어 둔다. 동대문 제일평화시장에서 휴일에 입을 야광색 꽃무늬 셔츠를 사기도 하고, 백화점 세일 때 보라색 안감을 댄 고급스러운 ‘폴 스미스’ 명품 수트도 장만한다. 로고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천박하다고 여긴다. 네이비 블루 등 좋아하는 취향이 확실하다.
허리선을 덮는 정장 바지로 튀어나온 배를 가리는 또래 넥타이 부대 친구들은 “왜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냐”고 힐책하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의 옷 사이즈도 모른다. 아내가 남편의 패션 코디를 전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40대는 스스로 패션에 신경을 쓰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죠.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평가로 통하던 시절을 거쳐 왔으니까요. 보이스카우트 제복처럼 남들과 비슷한 옷을 입었을 때 안정감을 얻었고요. 그러나 제게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 ‘패션 얼리 어댑터’가 뜬다.
8가지 패션 감성 유형 중 가장 급부상하는 층은 여성적인 이미지에 호의적인 ‘모던하고 편안한 코보스’와 ‘화려한 중년 신사’로 구성된 패션 얼리 어댑터 형이다. 패션 액티브 형이 조사 대상 남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이들은 점차 패션 얼리 어댑터로 이동하는 추세를 보인다.
‘패션 얼리 어댑터’는 여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자신의 스타일을 꾸민다. 미국 마케팅 조사회사인 NPD 그룹 조사에서도 남성복의 45%가 여성 동반 없이 스스로 구매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2000년 26%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로, 경제력을 갖추고 패션 감각을 갖춘 남성들이 제품 구매에 직접 나서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과장은 “한국 남성의 절반 이상이 속하는 ‘패션 액티브’형이 패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추세와 더불어 ‘모던하고 편안한 코보스’와 ‘화려한 중년 신사’로 빠르게 옮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제일기획이 최근 발표한 ‘미스터 뷰티’ 트렌드와도 상통한다.
미스터 뷰티는 남성적인 강인함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남성으로 외모와 패션에 관심이 많으며 부드럽고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다. 제품의 가격에 민감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실용적으로 구매하며 소비 계획을 꼼꼼하게 세운다.
이들은 화려한 액세서리, 다양한 기능성 화장품을 통해 나날이 예뻐진다. 메트로섹슈얼 또는 미스터 뷰티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도 한결 부드러워져 매끄러운 피부와 아름다운 헤어 스타일을 가진 남자들도 흔히 볼 수 있다.
2월 서울 갤러리아백화점 웨스트에 문을 연 남성 디자이너 편집매장 ‘맨 gds’의 주요 고객은 역시 미스터 뷰티이다. 이곳에 있는 정욱준 홍승완 서상영 김서룡 씨 등 인기 디자이너들의 옷은 몸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짧은 재킷이나 컬러풀한 셔츠 등이다. 정형화된 스타일을 거부하고 남들과 다른 느낌으로 멋을 내는 미스터 뷰티 고객들은 옷의 어깨 크기, 칼라 모양, 소매 처리까지 세심하게 따진다.
디자이너 정욱준 씨의 말은 변화하는 한국 남성의 패션 감성을 일목요연하게 대변해 준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 나이가 아니라 감성 나이입니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패션 얼리 어댑터들은 감성이 확실히 젊습니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멋에도 전략이 있다▼
‘패션 얼리 어댑터’ 남성들에게는 어떤 전략이 있을까.
백화점 바이어, 유명 스타일리스트, 패션 디자이너 등 옷 잘 입는다고 소문난 세 명의 남성들에게 노하우를 물었다. 이들은 자신만의 강한 패션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 갤러리아 백화점 바이어 우희원(33) 씨
남들과 다른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브랜드가 있는 멀티숍을 자주 찾는다.
멀티숍 ‘분더숍’의 아울렛인 서울 압구정동 ‘블러스’, 서울 청담동 ‘무이’가 단골 가게. 특히 ‘블러스’에서는 옷의 디자인이 ‘튀어’ 평범한 남성들이 잘 구입하지 않는 ‘헬무트 랭’ 티셔츠, ‘커스튬 내셔널’ 바지 등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동대문 거평 프레야의 구제 시장에서는 1960년대 광고 비주얼이나 하와이 야자수가 프린트된 빈티지(vintage) 캐릭터 티셔츠와 카고 팬츠를 구입한다. 셔츠는 압구정동 ‘고쉐’에서 맞춘다. 워싱하지 않은 청바지, 빈티지 티셔츠, 짧은 검은색 재킷 차림에 ‘올스타’ 캔버스화를 신는다. 지나치게 꾸민 것 같지 않게 캐주얼 빈티지 느낌을 내는 게 그의 전략.
→옷 못 입는 남성들에게=패션에 자신없는 남성들은 대개 옷을 사도 자신에게 익숙한 비슷한 디자인만 고르기 마련이다. 이때 과감한 도전을 부추기는 권유가 필요하다.
○ 스타일리스트 정윤기(35) 씨
백화점을 둘러보고 난 뒤 셔츠, 바지, 운동복 등 착용하고 싶은 아이템을 각각 다른 브랜드에서 따로따로 산다.
코디할 때는 전체적으로 색상이 세 가지를 넘지 않도록 한다. 자수 장식이 화려하게 놓인 ‘돌체 앤 가바나’ 청바지, 푸른색 ‘랄프 로렌’ 면 재킷, 푸른색 ‘폴 스미스’ 조끼, 흰색 ‘질 샌더’ 셔츠, 갈색 ‘아 테스토니’ 구두를 매치하는 식이다.
특히 조끼는 배가 많이 나온 체형을 가려주는 유용한 패션 아이템. 멋내기의 제1원칙은 자신의 체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야 맹목적으로 유행을 따르지 않게 된다. 동대문 제일평화시장도 한 달에 다섯 차례 정도 간다.
→옷 못 입는 남성들에게=청바지와 면바지는 너무 벙벙하지 않게 입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몸에 달라붙어도 안 된다. 스트라이프 무늬가 있는 컬러풀한 셔츠, 꽈배기 모양으로 꼬인 갈색 가죽 벨트를 구입하라.
○ 패션 디자이너 홍승완(38) 씨
주로 넥타이와 구두를 포인트 아이템으로 선택해 전체 코디에 활력을 준다.
영국 런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갈색 체크무늬 넥타이를 특별히 아낀다. 폭이 넓은 1970년대 빈티지 아이템으로 아이보리색 셔츠에 매면 멋스럽다. 강렬한 색상의 행커치프도 즐겨 사용한다.
브랜드에 얽매이지 않고 압구정동 로드숍을 지나치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산다.
T P O(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옷을 입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수트를 구입할 때 언제 어디서든지 입을 수 있는 것을 고르는 남성이 많지만 실은 수트야말로 용도에 따라 다르게 골라야 한다. 파티에서는 노골적으로 반짝이는 수트 대신 은근한 광택이 도는 수트가 고급스럽다.
→옷 못 입는 남성들에게=GQ, 에스콰이어 등 남성 라이프 스타일 잡지를 참고하면 패션에 대한 안목과 응용력이 키워진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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