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난 8월 위표(魏豹)를 달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뒤로 줄곧 말이 없던 역이기((력,역)食其)가 한왕에게 뵙기를 청했다. 한왕이 반가워하며 역이기를 안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오래 뵙지 못했소, 역 선생. 오늘은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내리시려고 찾아오셨소?”
“초나라가 옷깃을 여미고 대왕께 조회(朝會)하러 오도록 할 방책이 떠오르기에 이렇게 대왕을 뵈러 왔습니다.”
역이기가 별로 겸양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갈수록 몰리는 기분으로 울적해져 있던 한왕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찌하면 그리될 수 있겠소? 과인이 귀를 씻고 들을 테니 그 방책을 일러주시오.”
그러자 역이기가 몇 번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옛날에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쳐부수어 내쫓고도 그 후손을 기(杞)나라에 봉해주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은나라 주왕(紂王)을 쳐 없애고도 그 후손을 송(宋)나라에 봉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는 도덕을 저버리고 여러 제후국에 쳐들어가 육국(六國)을 모두 쳐부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명맥마저 끊어 후손들에게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진승과 오광이 한 농군으로 몸을 일으켜 진나라에 맞섰을 때, 천하가 모두 함께 들고 일어난 것은 실로 진나라의 그와 같은 무도함과 박덕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대왕께서는 참된 마음으로 육국을 되살리시고 그 후예를 찾아 복위시킨 뒤에 대왕의 관인(官印)을 내리십시오. 그리하면 그 나라의 군신(君臣)과 백성들은 반드시 대왕의 은덕을 우러르고 바람에 쓸리듯 그 위엄을 흠모하여, 한결같이 대왕의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덕의(德義)를 이룸이라, 대왕께서 그와 같이 덕의를 행한 뒤에 남면하여 패왕(覇王)을 일컬으시면, 머지않아 초나라도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우리 한(漢)나라에 조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왕이 들어보니 그 말이 장중할 뿐만 아니라, 뜻하는 바도 그럴 듯했다. 길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역이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좋소. 그리하리다. 과인이 명을 내려 급히 관인을 새기게 할 것이니 선생이 직접 그것들을 육국의 후손들에게 전하시오.”
그래놓고는 초나라 대군이라도 물리친 듯 후련해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때였다. 형양 성안에 갇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성밖을 둘러보러 나갔던 장량이 돌아와 한왕을 찾아왔다. 마침 저녁상을 받고 있던 한왕이 장량을 곁으로 불러들이고는 기분 좋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자방(子房). 낮에 우리 막빈(幕賓) 가운데 초나라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 계책을 낸 사람이 있었소. 그 때문인지 저녁상은 밥맛이 달구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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