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로 마음이 어지럽던 패왕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육고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육고가 미리 준비해온 대로 한신과 팽월, 경포를 들먹이며 그들의 세력을 과장했다. 그 말을 듣자 며칠 전 한왕의 세 갈래 사자가 형양성을 빠져나간 게 한층 더 께름칙했으나, 패왕은 여전히 내색 없이 말했다.
“그것들은 모두 과인이 형양성을 깨고 한왕 유방만 사로잡으면 허깨비가 되어 흩어질 머리 없는 귀신들이다. 허나 네가 명색 제후의 사자로 와서 하는 말이니 내 장상(將相)들과 그 일을 논의는 해보겠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범증을 불러오게 했다.
“유방이 사자를 보내 휴전을 청해왔소. 아부(亞父)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와서 싸움을 하다 그만두는 것은 반드시 그럴 까닭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지금 한군과 더 싸울 수 없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범증이 무슨 소리냐며 묻는 듯한 눈길로 패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패왕이 구차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과인이 싸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휴전으로 얻을 게 있어서요. 유방은 과인에게 형양 동쪽을 모두 들어다 바치기로 했소.”
“유방만 죽이면 형양 동쪽만이 아니라 천하가 모두 대왕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신과 장이가 조나라와 연나라를 차지하고 있고, 팽월과 경포의 무리도 곧 움직일 것이오.”
패왕이 비로소 마음속의 걱정 한 자락을 펼쳐 보이자 범증이 차게 웃으며 받았다.
“대왕, 또 장돌뱅이 유방에게 속으셨습니다. 바로 말씀드리자면 저들이 술과 고기로 흥청거릴 때나 불시에 군사를 내어 에움을 뚫고 세 갈래로 사자를 내보낼 때는 신도 적잖이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휴전을 청하는 한나라의 사자를 맞고 보니 오히려 모든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합니다. 지금 성안의 적은 식량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급히 구하러올 원병(援兵)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도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항왕도 그쯤 되자 그 며칠 형양 성안의 한군이 벌인 일들이 무엇을 노린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때 다시 범증이 어린아이 달래듯 간곡하게 권했다.
“대왕, 지금이야말로 유방을 잡아 죽이고 한나라를 쳐 없애기에 절호(絶好)한 때이니, 부디 이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번에 유방의 목을 얻지 않고 다시 놓아 보낸다면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말에 패왕이 시뻘게진 얼굴로 칼자루를 잡으며 소리쳤다.
“알겠소. 아부(亞父). 내 이제 사자로 온 자의 목부터 잘라 그 주인 유방의 간교한 속임수를 벌하겠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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