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영봉]연구기관까지 꼭 이전해야 하나

  • 입력 2005년 5월 30일 03시 24분


25일 지방으로 이전될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 177개의 명단이 공개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토연구원 등 정부출연연구기관 32개도 여기에 포함됐다.

얼마 전 행정도시건설추진단은 신행정도시에 24개 연구기관의 이전을 추진할 것을 발표하며 이것이 3만6000여 명의 인구유입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전 대상이 된 연구기관에는 제각기 다른 존립 목적이 있겠지만 그들이 이사하는 이유는 똑같다. ‘머릿수 채우기’인 것이다. 과거 축적된 물적 토대와 연구 인력을 거두어 지방도시의 인구를 채우고자 이동하는 것이다. 나머지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에 처음 눈뜨던 1960년대 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현 과학원), KDI 등 국책연구소가 설립됐고, 홍릉의 임업시험장에 이들이 수용됐다. 새 연구 단지를 건설할 때 대통령이 직접 터를 고르고 건설 현장을 거듭 방문하고 대통령조경담당비서관이 캠퍼스를 설계했다. 단지에서 종사할 연구 인력이 필요하면 외국에서 초빙하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전적 보상과 주거시설도 제공됐다. 국력에 비해 호사를 부린 셈이다.

이런 연구소들이 돈을 쓴 만큼 한국 경제 선진화에 기여했는지는 쉬 평가하기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후진국가가 얼마나 경제 발전에 몸부림치며 선진기술에 목이 말라 하는지는 잘 보여 줬다. 당시 외국 정부와 국제기관에서 초빙된 지식인, 관리, 투자자들은 이곳부터 방문했다. 여기에서 한국의 남다른 발전 의지가 그들 머리에 각인됐을 것이고, 한국에 대한 약간은 부풀려진 인상이 그들의 의사 결정에 유리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이곳에 남은 KDI는 정부에 매인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편향 없고 우수한 연구결과를 생산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긴 세월 안목 있게 조성된 연구, 자료, 강의, 회의 시설들은 수목 우거진 캠퍼스 등 연구소의 훌륭한 물적 기반시설과 어울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할 만한 명물(名物) 인프라가 됐다.

학교, 연구소, 기타 문화예술기관을 영어로 ‘인스티튜션(insti-tution)’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오랫동안 거기에 서서 제 역할을 다할 것을 기대하는 것. 그러므로 성공한 문화예술기관은 그 역사만큼 신뢰와 성가(聲價)를 얻는다. 이들 제도적 유산은 포도주 저장고와 같아 유형무형의 자산이 쌓이고 발효하여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홍릉의 KDI는 우리가 선진 사회의 격을 보여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유산’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옥석을 가리기는커녕 함께 부수어 똑같은 가루로 섞어 버리는 것이 시류인 듯하다. 과거 청산, 분배 균형, 기득권 타파가 시대의 명제이므로 명문의 이력이 오히려 숨겨야 할 대상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물적, 인적, 유형무형의 제도적 유산은 정부가 언제라도 부수고 버리고 다시 찍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머릿수 채우기식으로 분류해 177개 기관이 일괄적으로 근거지를 떠나는 한국 땅에서 명문기관은 존속할 수 없다.

맹자(孟子)의 말씀에 “거처는 기상을 변하게 하고, 먹고 입는 것은 몸을 달라지게 한다(居移氣 養移體)”고 했다. 충분한 준비 없이 학문과 문화의 중심을 떠나 낯선 새 도시로 거처를 옮기는 연구소에 예전의 기(氣)가 따라갈 것인가. 그 핵심 자산인 첨단의 두뇌인력을 계속 보양(保養)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학문적 기관을 평준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런 무차별한 기관 이동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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