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5>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4일 03시 0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편 그때 패왕 항우는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듯한 심사로 형양성에 사자로 보낼 군리(軍吏) 하나와 마주 앉아 있었다. 우씨(虞氏) 성을 쓰는 그 도필리(刀筆吏)는 초나라 군중(軍中)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처음 패왕의 귀에 넣어준 자이기도 했다.

“이번에 가거든 싸움을 그만둘 것처럼 하면서, 우리 장수들의 불충스러움을 흉보아라. 그리고 한왕과 그 신하들의 눈치를 살펴 군중에 떠도는 소문이 어디까지 참인지를 알아보아라.”

“그리하겠습니다.”

“특히 종리매 용저 주은 등은 이름을 들먹여 가며 저들의 인물평을 구해 보아라. 저들이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정말로 서로 내통하고 있다면 무언가 저들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부(亞父)의 일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군리가 그렇게 묻자 패왕의 얼굴은 마주 보기 민망할 만큼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애써 평온을 회복한 패왕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설마 아부까지 그렇기야 하겠느냐? 아부의 일은 굳이 파헤치려 하지 말라.”

그때 사람이 들어와 범증이 왔음을 알렸다. 범증은 항우의 속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치하부터 했다.

“형양성 안으로 사자를 보내기로 하셨다니 실로 잘한 일이십니다. 지금 성안의 형편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면 몇 만의 대군을 얻는 것보다 유방을 사로잡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 사자는 누구를 보내려 하십니까?”

“바로 여기 이 사람이오. 언변이 좋고 눈치가 빠르니 휴전을 의논하는 척하며 성안의 형세를 가만히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오.”

패왕이 시치미를 떼고 그 군리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범증은 형양 성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며, 그 군리가 자신의 운명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그 군리가 알아 와야 할 것만 한참이나 늘어놓은 뒤에 그를 놓아주었다.

“먼저 성안 군민(軍民)들에게서 주린 기색이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여자와 어린아이가 어떻게 보살펴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며, 성안을 다니는 우마의 수를 살펴야 한다. 병사들이 얼마나 지쳐있는지를 살펴야하고, 병장기나 갑주가 얼마나 상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사신을 접대하는 음식이 어떠하며, 그 음식을 만드는 숙수나 음식을 나르고 시중드는 사람들이 그 음식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성가퀴에 놓인 바위덩어리와 통나무도 살피고 성벽 위를 오가는 병졸들을 셈해 보는 것도 또한 네가 할 일이다….”

다음 날이 되었다. 초나라 사자는 수레에 높이 올라 있는 위엄 없는 위엄을 다 부리며 형양 성문 앞으로 왔다. 형양 성문이 열리고 한나라 군리가 나와 사자를 맞아들였다.

초나라 사자는 곧 한왕의 행궁(行宮) 격인 건물로 안내되었다. 기다리고 있던 한왕이 너털웃음과 함께 달려 나와 사자를 맞았다. 그리고 수인사도 나누기 전에 사자의 옷깃을 끌듯 하며 떡 벌어지게 잔칫상이 차려져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초나라 사자는 한왕이 워낙 은근하게 대하는 데 얼떨떨해졌다. 정신없이 이끌려 가다 보니 잔칫상이 차려지는 방이었는데, 상위에 오르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태뢰(太牢)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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