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연상이네요. 같은 멜로디가 2막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정염(情炎)을 태우는 장면의 2중창으로 등장하고 3막에서는 죽은 남자를 애도하는 여인의 독창으로 나오니까요. 금요일인 6월 10일은 이 작품이 초연된 140주년 기념일이니 이 작품을 상기하기에도 딱 좋은 때로군요.”
―그런데 이 노래를 들을 때 저는 속삭이는 정도의 밀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초적인 성애(性愛) 장면을 연상하곤 해요. 잘못된 것일까요?
“하하, 연상이야 듣는 사람 나름이니 잘잘못을 따질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의 2중창 장면을 보면 설득력 없는 얘기는 아닌 듯해요. 대사만 보아서는 어느 선까지 가는 ‘밀회’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우리들 한 숨결에 섞였네, 세상은 빛을 잃고….’ 물론 무대에서야 대담한 묘사까지는 나갈 수 없겠지만.”
―혹시 해외의 오페라 극장이나 영상물에서는 전통적인 것 보다 더 ‘대담한’ 연출을 할 수도 있겠네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바그너가 실제로 이 노래에서 성애의 묘사를 했다면 그것은 남자주인공 ‘트리스탄’이 아닌 여주인공 ‘이졸데’의 입장에서 그려낸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셨듯이 3막에서 이졸데가 혼자 이 선율을 노래하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여자의 ‘사랑’은 남자와 달리 간헐적(間歇的)인 곡선을 그린다고 하죠. 쏟아지듯 밀려왔다가 잦아들고, 또 밀려들고…. 이 노래의 감정 곡선이 꼭 그와 같습니다.”
―그것까지 감안했다면, 바그너는 대단한 관찰자로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음악이 동서고금의 음악작품 중 가장 ‘야한’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포함해서.”
―야하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성애를 즉물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정신적인 고양(高揚)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지요.”
―6월에 초연돼서가 아니라, 이 작품은 특히 초여름에 듣기 좋은 것 같습니다. 달궈진 대지가 서서히 식혀지는 초저녁에 창문을 열고 먼 곳을 바라보며 서서히 볼륨을 올리면….
“야릇한 생각이 드시나요, 가상의 독자여?”
―푸핫! 아닙니다. 그저 눈물나게 아름답습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