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6>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17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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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럼 장군은 어찌되는가? 장군이 과인으로 꾸미고 저들을 속인 걸 알면 패왕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장군은 나를 위하여 죽겠단 말인가?”

한왕 유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기신이 남의 말처럼 대답했다.

“아마도 열에 아홉은 그리 되겠지요. 허나 반드시 대왕을 위하여서만은 아닙니다.”

“그럼 또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게 신이 배움에 뜻을 둔 이후(志于學) 받은 성현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위태로운 걸 보면 목숨을 내던지는 것(見危致命)이 유자(儒者)의 바른 도리가 됩니다. 신이 몸을 일으켜(立身) 천하를 위해 일한 지도 여러 해, 이제 배운 바를 몸으로 따를(行) 때가 된 듯합니다.”

거기까지 듣자 한왕도 기신이 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기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장군의 뜻은 가상하나 과인은 차마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정히 초나라를 당해내지 못하면 군신이 나란히 성벽을 베고 죽을 뿐이다.”

저잣거리의 실용에 익숙할 뿐, 유가적인 이념미(理念美)에 단련 받지 못한 한왕으로서는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기신을 내쫓듯 돌려보낸 뒤에도 한왕은 한동안 알 수 없는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때 근시가 들어와 이번에는 진평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한왕을 진평을 들이게 한 뒤 먼저 기신이 한 말부터 들려주고 물었다.

“호군(護軍)은 기신의 일을 어찌 보시오?”

“이제 유가의 가르침이 대왕의 나라에 찬연히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평소 실질을 중시하는 진평답지 않게 말을 꾸며 하는 것을 보고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대왕께서는 평소 유자들을 놀리고 욕보이셨습니다. 허나 그게 오히려 유자들을 분발시킨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양(高陽)의 객사에서 역((력,역))선생 이기를 무례하게 맞았으나 역선생은 오히려 대왕을 위해 진류의 현령을 항복하게 만들었으며, 우현(虞縣)에서 알자(謁者) 수하(隨何)를 함부로 깔보다가 오히려 수하로 하여금 경포를 대왕께로 끌어들이는 큰 공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제 기신의 분발 또한 대왕께서 우현으로 찾아온 주가와 기신을 놀린 일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요?”

“실은 조금 전 기신이 신을 찾아와 대왕께 올린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얘기 끝에 기신은 대왕께서 먼저 견위치명(見危致命)이란 말씀을 하신 바 있다고 했습니다.”

“과인이 우현의 진중에서 한 말은 그저 우스갯소리였을 뿐이오.”

“진중에서는 희언(戱言)이 없다는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게다가 기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반드시 유자의 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만이 지금 우리 대왕께서 고르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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