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온지 감독의 2001년 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연령의 회색지대에 빠져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 나오는 아이들은 이미 너무 커버렸지만 한편으론 오래 전에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지독할 만큼 알아버렸지만 정작 그 세상사에는 전혀 끼지 못하는 아이들. 이들은, 어른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폭력과 정신적 학대의 환경 속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그걸 맘 놓고 얘기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상대조차 없이 고립돼 살아간다.
류이치는, 쿠노는, 호시노는, 그리고 짐작하건대 영화 속 중학생 거의 모두는, 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사이버 네트워크로 릴리 슈슈에 대해 채팅을 벌인다. 프로그레시브 록 혹은 애시드 록의 음악을 구사하는 아이돌 스타 릴리 슈슈는 이들 홀로된 청소년들의 연인이자 우상이며 생의 진리를 갈파하는 스승이고 예언자이다. 무엇보다 릴리 슈슈와 그녀의 음악은 아이들이 공포스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다. 이들은 인터넷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릴리 슈슈의 에테르(빛이나 X선과 같은 전자기파를 전달한다고 여겨지는 이론적인 매질. 영화에서는 ‘순수한 영혼의 결정’ 같은 것을 의미한다)에 대하여. 그리고 릴리 슈슈가 얘기하는 절망과 구원에 대하여. 우리들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수 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개봉하는 일련의 이와이 온지 작품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포함해 ‘언두’ ‘피크닉’ 그리고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등 4편의 영화는 ‘러브레터’가 이룬 공전의 히트 ‘덕’ 혹은 ‘탓’에 우리가 그간 갖고 있었던 이와이 온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많은 부분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이와이 온지의 영화는 국내에서 ‘러브레터’ 이후 ‘4월 이야기’에서 ‘하나와 앨리스’로 겅중겅중 뛰면서 개봉되는 바람에 그의 진면목이 올바로 드러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와이 온지는 그래서, 그저 청순한 멜로를 우아한 영상과 매끄러운 음악으로 빚어내는 인물쯤으로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이와이 온지가 세상사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과 걱정과 분노를 지니고 있는 인물인가를 보여 준다. 그런 면에서 이번 그의 ‘작품전’은 이와이 온지에 대한 일종의 재발견 같은 행사가 되는 셈이다.
언뜻 보기에 이와이 온지는 중고등학생 제복의 시기로 돌아가려는 퇴행기적 성향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이와이 온지를 소녀취향이니 혹은 페도필(pedophill:성적으로 아동들에게 끌리는 심리적 성향)이 있다느니 하면서 그를 다소 평가절하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들 혹은 국내에서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들은 대단히 암울하고 염세적이며 세기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꾸 아동기로 돌아가려고 하는 진짜 의도는, 지금의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게 된 시작이 어디인가를 찾으려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보여지는 이와이 온지의 수려하고 빼어난 영상미학,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진 엽기적 잔혹성은 지금의 일본사회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알레고리와 같은 것이다. 평온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치장돼 있는 일본사회의 이면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신들은 그 악마성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와이 온지는 통렬한 자기고백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 절망의 마음은 그를 때론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환상의 세계(‘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로 이끌거나,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사랑의 이야기(‘언두’)로, 혹은 그보다 더한 극단의 염세적 세계(‘피크닉’)로 이끌어 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이와이 온지의 일관된 정서는 가식과 위선 속에 방치돼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우리 모두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그의 영화가, 역설적으로 너무나 투명하고 영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나 슬퍼서 아름다운 사람. 바로 이와이 온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23일 개봉.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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