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9>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1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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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내 반드시 돌아오겠소. 부디 그때까지만 살아계시오!”

“대왕께서도 옥체를 보전하시어 천하를 포악한 항왕의 손에서 구해주십시오. 저희들은 땅 바닥에 간과 뇌를 쏟게 되더라도 이 형양성을 지켜낼 것입니다.”

네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다짐했다. 한왕이 그들 넷을 한참이나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결연히 돌아서며 소리쳤다.

“가자. 어서 떠나 서초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모아보자. 그리하여 하루라도 빨리 이 형양성을 구하러 돌아오는 것이 남아서 지키는 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다.”

그리고는 말배를 박차 그 사이 소리 없이 열려있는 서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한왕과 함께 형양성을 나가게 된 사람들도 저마다 남은 사람들에게 작별의 말을 남기고 그 뒤를 따랐다.

주가(周苛)와 종공(종公), 한왕(韓王) 신(信), 위왕(魏王) 표(豹) 네 사람은 성문 밖까지 나가 한왕 일행이 서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사이에도 한왕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나갈 태세였다. 하지만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내닫던 한왕 일행은 별탈 없이 서쪽 성고(成皐)로 드는 골짜기로 사라졌다.

네 사람은 그제야 성안으로 들어와 다시 성문을 닫아걸게 했다. 그런데 성문에 굵은 빗장이 미처 다 질러지기도 전이었다. 주가와 종공이 서로 가만히 눈짓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칼을 빼들어 위왕 표를 찍었다. 위표가 놀라며 피해보려 했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비니 피해낼 길이 없었다. 이내 칼을 맞고 버둥거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아니, 두 분 장군. 이 무슨 일이오? 대왕께서는 우리 네 사람이 서로 합심하여 형양성을 지키라 하지 않았소?”

위표가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놀란 한왕 신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주가가 다시 한번 종공과 눈을 맞춘 뒤에 차갑게 대답했다.

“나라를 저버린 적이 있는 왕(反國之王)과는 함께 성을 지켜내기 어렵소.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의논 끝에 위표를 죽이기로 한 것이오.”

나라를 저버린 적이 있는 왕이란 말은 전에 위왕 표가 한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에 항복한 일을 가리킨다. 한왕 신도 그 말을 알아들었으나 그래도 주가와 종공이 한 일을 승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왕은 그 일을 뉘우치고 대왕께서도 위왕을 용서하시지 않았소? 지금 강한 적을 맞아 군사 한 명도 아쉬운데 아까운 장수를 죽이니 실로 두 분의 뜻을 알 수가 없소.”

그렇게 두 사람에게 따지고 들었다. 주가가 다시 흔들림 없는 어조로 받았다.

“한 번 깨진 사발을 다시 맞출 수는 없소. 사람의 신의도 그러하니, 한 번 군왕을 저버린 자가 두 번인들 못하겠소? 위표가 다시 마음이 변하여 성안에서 적에게 호응하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형양성을 지키기는 애초부터 글러 버린 일이오. 차라리 일찍 죽여 걱정을 없애는 게 상책일 것이오.”

종공도 주가를 거들어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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