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은 이제 군사 2000에 500기(騎)를 이끌고 한단(邯鄲)으로 가서 대장군 한신의 명을 따르라.”
그때껏 마음 졸이며 한왕을 호위해 온 관영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였다.
“그럼, 대왕은 누가 호위합니까? 아직도 함곡관까지는 500리 가까운 길이 남았습니다.”
관영이 그렇게 묻자 한왕은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한단으로 가는 길에 오창(敖倉)으로 사람을 보내 조참(曺參)은 장군과 같이 대장군 한신에게 배속되게 하고, 주발(周勃)은 샛길로 과인을 따라오게 하라. 여기서 함곡관까지는 남은 장졸들만으로도 넉넉하다.”
마치 천하의 형세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사람 같은 말이었다. 패왕이 형양성을 에워싸고 있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건만, 범 같은 두 장수와 적지 않은 군사를 하북(河北)과 산동(山東)에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뒷날로 보면 요긴한 배치였으나, 그때로서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결정이라 관영이 다시 한왕을 보고 물었다.
“지금 우리는 기신과 주가를 죽을 곳에 남기고 간신히 형양성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고에서도 버티지 못해 관중으로 물러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장졸을 갈라 조나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까?”
“천하를 다투자면 조(趙) 연(燕) 제(齊)부터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대장군 한신과 장이만으로는 일의 진척이 너무 더디다. 그대들 풍패(豊沛)의 맹사(猛士)들이 가봐야겠다.”
한왕이 눈도 껌벅하지 않고 그렇게 받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관영이었다. 한왕이 그렇게 억지처럼 나오자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는지 태도를 바꾸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 공손하게 한왕의 말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대왕의 뜻을 받들어 먼저 한단으로 가겠습니다. 대왕께서도 저희와 호응하는데 너무 늦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는 다음날로 500기에 보졸 2000을 이끌고 한단으로 떠났다.
관영이 그렇게 한왕의 말을 믿고 따르게 된 것은 아마도 한왕에게서 이따금씩 번뜩이는 직감이나 어려울 때마다 한왕을 구해주는 알지 못할 행운 같은 것들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량과 진평도 관영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면서도 굳이 그런 한왕을 말리지는 않았다.
한왕은 장졸 대부분을 낙양에 남겨 지키게 하고 자신은 다시 몇 십 기만 거느린 채 함곡관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해 팽성에서 패왕에게 여지없이 지고 허둥지둥 관중으로 쫓겨든 지 꼭 1년 만이었다. 태자 영(盈)과 함께 도읍인 역양((력,역)陽)을 지키고 있던 승상 소하가 위수(渭水) 나루까지 사람을 보내 한왕을 영접하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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