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0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4일 03시 1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변화를 살펴보신다면 무엇을 언제까지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곁에 있던 장량이 한왕을 대신해 조심스레 대답했다.

“대장군 한신이 조나라와 연나라를 평정하고 산동(山東)을 바라보고 있음은 구강왕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대왕께서는 다시 관영과 조참을 보내 대장군을 거들게 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제(齊)나라까지 우리 편으로 거둬들이게 될 듯합니다. 또 대왕께서는 하수(河水)가에 있으면서 항왕의 양도(糧道)를 끊고 있는 팽월에게도 사람을 보내, 이번에는 수수(휴水)를 건너 서초(西楚) 깊숙이 들어가라 이르셨습니다. 그저 초군(楚軍)의 양도만 끊는 게 아니라, 바로 서초의 곡창을 불살라 아예 군량으로 보낼 곡식을 없게 하려는 뜻이지요. 따라서 그 둘 중 어느 한쪽만 일어나도 항왕은 이곳에서 한가롭게 우리를 에워싸고 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급한 성격을 이기지 못해 북쪽으로 동쪽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기력을 소모할 터이니, 우리는 짧은 칼 한 자루만 갈아두어도 지치고 상한 호랑이의 목을 따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제야 경포도 흔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둑 떼를 이끌고 젊은 날을 보내면서 막싸움으로 익힌 감각이 있어 장량이 하는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병가(兵家)들의 말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것이라더니, 자방(子房)선생의 말을 들으니 무슨 말인지 알 듯도 합니다. 성벽을 굳게 하고 싸우지 않는 것(堅壁不戰)도 좋은 싸움이 될 듯합니다.”

경포의 그 같은 말에 장량이 일깨우듯 몇 마디 보탰다.

“하지만 농성(籠城)도 곧 편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거리는 멀지만 완(宛)과 섭(葉) 두 성이 입술과 이처럼 서로 지키고 보살펴야만 항왕이 더 급한 곳으로 옮겨갈 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날 경포는 구강군(九江軍)을 이끌고 완성으로 내려가고, 한왕은 섭성에서 패왕을 맞아 농성할 채비에 들어갔다. 한왕이 군민을 풀어 성밖 해자(垓字)를 깊게 파고 돌을 날라 성벽을 높고 두껍게 하니 며칠 안돼 섭성은 달라졌다. 비록 쇠로 된 성벽에 끓는 물이 찬 못(金城湯池)을 두르지는 않아도 적이 결코 얕볼 수 없는 굳건한 성이 되었다.

형양성에서 곤궁을 겪어본 한군은 관중에서 날라 온 곡식을 성안에 들이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인근 촌락에서 곡식을 더 거둬들이고 가축을 몰아와, 짧아도 반년은 버틸 군량을 마련했다. 농성에 쓰일 다른 물자들도 넉넉히 모아들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패왕 항우의 대군이 섭성으로 몰려든 것은 그와 같은 농성 채비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이었다. 형양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고 몇 백리 남쪽으로 끌려온 분풀이 삼아 패왕은 첫날부터 맹렬하게 섭성을 들이쳤다. 미리 헤아리고 있던 일이라 첫날은 한군도 잘 막아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전날 마구잡이 공성(攻城)으로 입은 손실 때문인지 그날 패왕은 성을 들이치기 전에 한왕을 먼저 문루(門樓)로 불러냈다. 한왕이 무덤덤한 얼굴로 패왕을 내려보다가 불쑥 물었다.

“성을 에워쌌으면 급히 쳐서 깨뜨릴 일, 초왕은 어찌하여 과인을 찾는가?”

마치 남의 일 말하듯 그렇게 묻는 말투가 벌써 패왕의 심사를 밑바닥부터 긁어놓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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