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04>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8일 03시 06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하수(河水) 일대에서 우리의 양도(糧道)를 끊고 분탕질을 치던 팽월이 이제는 수수(휴水)를 건너 우리 초나라의 곡창을 노리고 있습니다. 신이 설공과 더불어 막아 싸우고 있으나 팽월의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습니다. 지금은 하비(下비)로 향하고 있는데, 저희가 끝내 지켜낼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하비라면 팽성의 등줄기요, 강동(江東)의 곡식을 거두어 쌓아둔 서초의 곡창이기도 했다. 팽월이 설치고 다닌다고 하던 하수(河水) 부근으로부터는 1000리가 훨씬 넘는 곳인데, 팽월이 거기까지 내려가 휘젓고 다닌다니 패왕은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울화부터 치밀었다.

“팽월 그 쥐 같은 늙은 것이 정말로 간이 부었구나. 우리 양도를 끊고 다닌 것만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초나라의 곡창을 노린다고? 용서할 수 없다. 내 반드시 그 늙은 도적놈을 사로잡아 갈가리 찢어놓으리라!”

패왕이 그렇게 소리치며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그날로 군사를 동쪽으로 빼려 했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투혼(鬪魂)이요 자신감이었지만, 실은 그와 같이 바쁘게 돌아치지 않으면 안되는데 패왕 항우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왕 유방도 싸움터를 떠돌기는 마찬가지였으나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작전을 구사하는 세력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조나라와 연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장군 한신과 상산왕 장이가 그러하였고, 방금 산동을 휩쓸다가 초나라 땅 깊숙이 남하하고 있는 팽월이 그러하였다. 당장은 완성에 있으면서 섭성의 한왕과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루고 있지만 경포도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따로 전단(戰端)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고, 관중에 있는 소하도 징병과 보급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왕의 명을 받들고 있었지만, 한왕과 연결이 전혀 없이도 독자의 판단과 구상에 의지해 패왕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패왕 항우에게는 아무런 명령이나 지시를 받지 않고도 한왕 유방과 싸워낼 수 있는 독자의 세력이 전혀 없었다. 장수들 중에는 방금 형양성에 남아 있는 종리매처럼 간혹 패왕과 떨어져 싸우게 되는 수가 있었지만, 그때도 맡겨진 것은 한 지역의 전투에 국한된 지휘권일 뿐이었다. 때로 패왕과 온전히 연결이 끊어진 경우에도 그저 초군의 한 별동대(別動隊)일 뿐, 독자적인 세력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곧 초나라 장수들은 모두가 패왕의 부장(部將)으로서 받은 군령을 수행이나 전달할 뿐이었고, 전략 전술을 독자적으로 수립하는 작전권은 없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정책적인 고려가 필요한 작전이거나 전략적 요충을 둘러싼 싸움은 언제나 패왕 자신이 달려가야 했다.

뒷날에 이르러서는 한나라와 초나라의 상부 지휘구조가 그렇게 달라진 까닭이 여러 가지로 따져지고, 결국은 지도자의 자질이나 개성과 연관을 맺는 논의로 번지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한왕 유방도 패왕 항우도 그런 지휘구조의 득실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때까지 해온 그대로 밀려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패왕이 천하가 좁다고 내달려온 피로를 느낄 겨를도 없이 동쪽으로 팽월을 잡으려 떠나려는데 북쪽에서 갑자기 반갑지 않은 소식이 와서 패왕의 발목을 잡았다. 형양성을 지키던 종리매가 급하게 사람을 보내 알려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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