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승부수’로는 지역구도 넘지 못한다

  • 입력 2005년 7월 16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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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총선 때의 일화(逸話)다. 대구의 한 지역구에 출마해 초반 열세를 뒤집고 당선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사례를 하러 노인정을 찾았다고 한다.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데 한 노인이 대뜸 “내 박근혜 찍었다 아이가” 하더란다. 당신은 잘 모르지만 ‘박근혜 사람’이라 찍어 줬다는 얘기다. ‘박근혜 바람’이 탄핵역풍을 뚫고 그를 구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그렇게 대구에서는 12석 모두를 싹쓸이했고, 영남권 전체 68개 지역구 중 60곳에서 승리했다. 열린우리당은 4석(부산 1, 울산 1, 경남 2)을 건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득표율을 보면 60 대 4의 ‘원 사이드 게임’은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부산에서 33.7%, 대구에서 22.3%, 울산에서 31.2%, 경북에서 23.0%, 경남에서 31.7%를 득표했다.

이런 득표율은 2000년 16대 총선에 비해 두 배에서 세 배까지 높아진 수치다.

한나라당은 16대 총선 이후 호남지역에서 3% 안팎의 낮은 득표율에 묶여 있다. 상당수 지역구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전북과 전남에서 각각 23.4%, 17.7%의 득표율을 올렸지만 의석은 단 한 곳(전북 군산을)뿐이었다.

득표율이 의석수에 반영되지 못하는 것은 표의 등가성(等價性)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호남 지역구도만 놓고 보면 한나라당이 중대선거구제든,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든 새로운 선거제도 도입에 반대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넓고 크게 보면 꼭 그럴 것만도 아니다. 지난해 총선의 경우 한나라당은 서울지역 득표율에서 열린우리당에 37.7% 대 36.7%로 1%포인트밖에 밀리지 않았지만 의석수는 32 대 16으로 반타작밖에 못했다. 수도권 전체로 봐도 득표율은 11%포인트 차이인데 의석수는 43석(열린우리당 76석, 한나라당 33석)이나 벌어졌다.

그렇다면 권역별 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역구도 문제에는 이처럼 명분과 함께 현실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개혁-반(反)개혁으로 몰아가면 오히려 지역감정만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지역주의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다. 경부(京釜) 축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 과정에서 누적된 자원 배분 및 권력 엘리트 충원에서의 영남 편중, 전두환 정권의 ‘광주 학살’, 양김(兩金)의 분열과 반목, 정치권의 지역감정 부추기기 등이 30년 세월 동안 이어지면서 지역주의는 논리가 아닌 정서와 감정으로 내면화됐다.

내면화된 정서와 감정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선거제도를 바꾼다고 단숨에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지역구도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서와 감정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여당의 친노(親盧) 직계 의원들은 연정론(聯政論)에 대해 “지역구도 해소라는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 대통령도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제 스스로 ‘진정성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아프게 인식해야 한다. 그가 지난날 지역주의 벽에 도전하고 좌절했을 때 많은 사람이 ‘노무현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정략적 승부수’로 보고 있을 뿐이다.

원칙을 지키고 정도(正道)를 걸을 때에야 진정성은 인정받을 수 있다. 영남지역 낙선자들을 줄줄이 정부 및 공기업의 요직에 앉히면서 지역 구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서야 그것이 무슨 원칙이고 정도인가. 과반에서 불과 4석이 적은 여소야대(與小野大) 때문에 대통령 하기 힘들다고 해서야 누가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덜컥 야당에 총리 자리 주겠다고 해서야 누가 그런 진정성을 믿겠는가.

노 대통령은 하루빨리 인위적 연정이나 개헌 꿈을 접어야 한다. 독선으로 왜곡된 ‘진정성의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공연히 고집 부릴 일이 아니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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