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12>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18일 03시 14분


“저것들은 억지로 끌려 나오거나 먹을 것이나 얻자고 팽월을 따라다닌 유민(流民)들이 아니다. 팽월 그 늙은 도적놈이 좋아 스스로 따라나선 것들이니 용서할 수 없다. 모두 묻어라.”

패왕이 불꽃이 튀는 것 같은 눈길로 그들을 한 번 더 노려보며 그렇게 받았다. 그 바람에 계포가 움찔하며 물러나자 더는 패왕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근처 골짜기로 끌려간 팽월의 졸개 1000여 명은 잠깐 동안에 구슬픈 비명과 함께 땅속에 묻혀 버렸다.

“이곳에 진채를 내리되 기둥은 얕게 묻고 군막은 세우지 말라. 언제든지 진채를 뽑아 떠날 수 있게 해야 한다.”

패왕은 그렇게 말해 군사들을 쉬게 한 채 척후(斥候)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땀투성이가 된 척후 둘이 지친 말을 타고 돌아와 알렸다.

“서쪽으로 50리나 달아난 팽월은 상현(相縣) 못 미친 곳에 진채를 내리고, 사방으로 흩어진 졸개들을 모으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은 곧 장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지금 곧 젊고 날랜 군사 1만을 골라 일찍 저녁밥을 지어 먹이고 푹 쉬게 하라. 삼경에 일어나 차림을 가볍게 하고 과인을 따라 팽월의 진채를 야습할 병력이기 때문이다. 50리 길이 결코 가깝지는 않으나, 기마와 더불어 달려가면 날 샐 무렵에는 적진을 덮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가 팽월 그 놈의 자다 깨 놀란 목을 벨 차례다.”

싸움이라면 패왕을 하늘같이 믿는 초나라 장수들이었다. 모두 그 말에 따라 팽월을 야습할 채비에 들어갔다. 강동에서 따라 온 오중(吳中) 자제들을 중심으로 젊고 날랜 군사 1만 명을 골라 배불리 먹인 뒤 삼경까지 푹 쉬게 했다.

그날 밤 삼경이 되었다. 패왕은 가려 뽑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이번에도 스스로 앞장을 섰다. 패왕이 거듭 앞장을 서는 것은 그만큼 팽월이 밉살스럽다는 뜻이기도 했다.

척후가 알아 온 대로 팽월은 상현 못 미친 곳 한 갈래 회수(淮水) 지류 가에 진채를 내리고 있었다. 밤새 군사를 휘몰아 달려간 패왕은 날이 훤해 질 무렵 팽월의 진채에 이르렀다. 아직 잠들어 있는 팽월의 진채를 가만히 살피던 패왕이 오랜 만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 이제 네 놈의 늙은 목은 내 주머니 속의 물건이나 다름없다. 겨우 50리밖에 달아나지 못한 주제에 진채를 얽기는커녕 파수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잠을 자? 그것도 물러날 곳 없는 물가에서…. 작년에 한신(韓信)이란 더벅머리가 물을 등지고 싸워 진여(陳餘)가 이끈 조나라 대군을 이겼다 하나, 나는 진여가 아니다!”

패왕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군사를 휘몰아 팽월의 진채로 밀고 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팽월의 진채는 초군 기마대가 밀려들어 군막을 짓밟아도 조용하기만 했다. 그제야 이상하게 여긴 초나라 군사들이 이리저리 진채 안을 휩쓸고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팽월의 군사들은커녕 어리친 개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이 간사한 도적놈에게 또 속았구나. 이게 어찌된 일이냐?”

성난 패왕이 억지로 화를 눌러 참으며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찔끔한 장수들이 군사를 풀어 부근 백성들에게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군사들이 돌아와 일이 그렇게 된 경위와 팽월이 달아난 곳을 일러 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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