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19>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26일 03시 09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이놈들. 이래도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패왕이 성벽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집어 들고 얼빠진 사람마냥 굳어 있는 한나라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문루를 지키던 한나라 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 창칼을 내던지고 털썩털썩 꿇어앉았다.

그러자 패왕은 다시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인지경 내닫듯 거침없이 성벽을 내려가 성문 쪽으로 갔다. 성문 빗장을 지키던 기장(騎將) 하나와 사졸 여남은 명이 그 갑작스런 변화에 어리둥절해진 눈길로 패왕을 쳐다보았다. 패왕이 문루를 지키던 장수의 잘린 머리를 무슨 부적처럼 그들 앞에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과인이 바로 서초 패왕이다. 이 꼴이 나기 싫거든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러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은 마치 한왕 유방의 명을 받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분고분 성문을 열었다. 한나라 기장도 갑자기 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말 위에 앉은 채 그런 졸개들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열린 성문으로 밖에 나간 패왕이 가까운 초나라 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성문이 열렸다. 초나라 장졸들은 모두 이리로 들라!”

그렇게 되자 지난 열 달 한왕 유방이 관동(關東)의 근거지로 삼아 온 땅이었고, 한왕이 빠져나간 뒤 두 달은 패왕의 불같은 포위 공격을 버텨낸 주가와 종공의 투지로 이름났던 형양성에도 마침내 그 마지막 날이 왔다. 동문으로 쏟아져 들어간 초나라 군사들이 성안을 휩쓸면서 성벽 위를 지키던 한군의 사기는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달아날 길이 있는 한군은 모두 달아나고 나머지는 무기를 내던지며 항복했다.

성 안팎에서 창칼 부딪는 소리가 그치고 이제는 더는 맞서는 한군이 없어지자, 한왕 유방의 행궁(行宮) 터에 자리 잡은 패왕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주가와 종공, 한왕(韓王) 신(信)은 어찌되었느냐? 사로잡지 못했으면 시체더미를 뒤져서 시체라도 찾아오너라.”

워낙 빈틈없이 에워싸고 성을 친 터라 달아났을 턱이 없다고 굳게 믿는 패왕의 말투였다. 그러나 셋 중 아무도 보지 못한 장수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는데, 반가운 전갈이 왔다.

“방금 주가를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여느 백성 차림으로 바꿔 입고 성을 빠져나가려다가 우리 군사에게 들켰는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려 하는 것을 겨우 말리고 묶어 이리로 끌고 오는 중이라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이 어둡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어째 살도 뼈도 없는 것처럼 뻗대던 맹사(猛士)와는 잘 어울리지 않은 끝이로구나. 하지만 잘됐다. 내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어서 이리로 데려오라!”

그러자 오래잖아 온몸을 밧줄로 동이듯 묶인 주가가 끌려왔다. 겉에 걸치고 있는 추레한 백성들의 옷에는 모질고 끔찍했던 싸움의 흔적이 여기저기 핏줄기로 배어 나와 있었다. 그러나 패왕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굽히는 빛이 없었다. 그런 데서 엿보이는 사납고도 꺾일 줄 모르는 주가의 기상이 슬며시 패왕을 감동시켰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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