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최단명이라 할 수 있는 홍 대사의 5개월은 화려한 출발에서부터 갑작스러운 낙마까지 뉴스와 논란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12월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은 “깜짝 놀랄 만한 인사를 워싱턴에 보낸다”며 ‘홍석현 카드’를 꺼냈다. 아그레망(주재국 사전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대사를 임명하는 것은 외교적 비례(非禮)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뉴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홍 대사는 언론사 사주(社主)가 정권에 참여하는 배경을 놓고 소문이 끊이지 않자 “내 꿈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말을 꺼냈다. 진심이냐, 아니면 ‘대권의 꿈’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냐는 억측과 함께 “주미 대사 자리를 유엔 사무총장 선거를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어쨌거나 이제 그에게서 유엔 사무총장은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월 부임 후 홍 대사는 나름대로의 경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의욕을 보였다는 게 대사관 관계자들의 평가다.
그의 워싱턴 외교무대 공식 데뷔는 5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오찬 연설. 그는 당시 워싱턴 일각의 오해를 샀던 ‘동북아 균형자론’을 적극 해명하고, 한국의 반미 정서에는 미국의 책임(1980년대 군사정권 지지)도 있다고 강조했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6월 10일 한미정상회담을 잘 치러낸 것은 최대 성과”라고 평가한다. 한 소식통은 “회담 장소를 부시 대통령의 개인 목장이 있는 텍사스 주 크로퍼드로 결정하도록 추진했다가 좌절됐지만, 홍 대사의 역량 부족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6월 말 뉴욕을 전격 방문해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박길연 대사를 면담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나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당신처럼 말하는 한국 대사는 처음 본다”며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그는 7월 초 다시 유엔 사무총장 출마 계획을 공언해 구설에 오르는가 하면 공직자 재산공개 과정에서 토지 위장 전입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역대 주미 한국대사 | ||||
대 | 이름 | 재임 | 재임 기간 | 당시 정부 |
1 | 장 면 | 1949년 2월∼1951년 2월 | 2년 | 이승만 정부 |
2 | 양유찬 | 1951년 4월∼1960년 4월 | 9년 | |
3 | 정일권 | 1960년 5∼9월 | 4개월 | 허정 과도정부 |
4 | 장이욱 | 1960년 10월∼1961년 6월 | 8개월 | 윤보선 정부 |
5 | 정일권 | 1961년 6월∼1963년 4월 | 1년 10개월 | 5·16 군사정부 |
6 | 김정렬 | 1963년 5월∼1964년 10월 | 1년 5개월 | 박정희 정부 |
7 | 김현철 | 1964년 12월∼1967년 10월 | 2년 10개월 | |
8 | 김동조 | 1967년 10월∼1973년 12월 | 6년 2개월 | |
9 | 함병춘 | 1973년 12월∼1977년 4월 | 3년 4개월 | |
10 | 김용식 | 1977년 4월∼1981년 6월 | 4년 2개월 | |
11 | 류병현 | 1981년 7월∼1985년 11월 | 4년 4개월 | 전두환 정부 |
12 | 김경원 | 1985년 11월∼1988년 4월 | 2년 5개월 | |
13 | 박동진 | 1988년 4월∼1991년 3월 | 2년 11개월 | 노태우 정부 |
14 | 현홍주 | 1991년 3월∼1993년 4월 | 2년 1개월 | |
15 | 한승수 | 1993년 4월∼1994년 12월 | 1년 8개월 | 김영삼 정부 |
16 | 박건우 | 1995년 1월∼1998년 4월 | 3년 3개월 | |
17 | 이홍구 | 1998년 5월∼2000년 8월 | 2년 3개월 | 김대중 정부 |
18 | 양성철 | 2000년 8월∼2003년 4월 | 2년 8개월 | |
19 | 한승주 | 2003년 4월∼2005년 2월 | 1년 10개월 | 노무현 정부 |
20 | 홍석현
| 2005년 2월∼현재(25일 사의 표명) | 5개월? | |
자료:주미 한국대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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