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주가의 숨이 끊어져 행궁 뜰이 고요해졌을 무렵이었다. 다시 한때의 군사들이 한나라 장수 한 사람을 묶어 오며 소리쳤다.
“주가의 부장(副將)인 종공(종公)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친 채 민가(民家) 마루바닥 밑에 숨어 있다가 우리 군사에게 들킨 것이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이 얼굴을 찌푸리며 보고 있다가 종공이 발 앞까지 끌려오자 빈정거리듯 말했다.
“너희 유자(儒者)의 무리들은 항복할 수 없다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을 줄도 모르느냐? 어찌하여 한결같이 남의 수고로움으로 제 죽음을 치장하려 드느냐?”
종공이 고개를 번쩍 들어 패왕을 쏘아보며 말했다.
“옛적에 공자께서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봉변을 당하게 되셨을 때, 뒤떨어진 안회(顔回)가 죽음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하신 적이 있소이다. 그러나 안회는 살아 돌아와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하오. 남의 신하된 자도 같소. 임금께서 살아계시면 마땅히 몸을 보존하여 뒷날을 도모하여야 하는 법이오. 한번 졌다고 함부로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임금께서 뒷날 이 몸을 쓰시고자 하여도 쓰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니 불충(不忠)이 아닐 수 없소.”
“그러나 사로잡혔으니 어쩌겠느냐? 너도 주가나 기신처럼 과인의 노여움을 빌려 네 죽음을 치장하고 싶으냐?”
“그 죽음이 모질고 끔찍해 아름다워질 수는 있으나, 실로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닐 것이오. 인정을 베풀 수 있다면 나는 되도록 빨리 죽여주시오!”
그러자 패왕이 더 길게 주고받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과인도 이제 더는 몇 백 년 전에 죽은 귀신의 말에 홀린 더벅머리 유생들의 죽음을 치장해주고 싶지 않다. 저자를 끌어내 목을 베어라!”
하지만 형양성을 지킨 모든 장수가 기신이나 주가, 종공처럼 죽은 것은 아니었다. 종공이 목이 떨어지고 오래지 않아 관중으로 달아나는 길목을 지키던 용저(龍且)가 한 장수를 잡아 묶어 왔다. 한왕(韓王) 신(信)이었다.
끌려온 한왕 신은 이미 몰골부터가 주가나 기신의 부류와는 달랐다. 허여멀쑥한 얼굴은 두려움으로 퍼렇게 질려 있었고, 끌고 오는 군사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멀쩡한 허우대는 보기 민망하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끌려오는 동안에 주가와 종공의 죽음을 얘기 들은 탓인 듯했다.
하지만 주가와 종공의 죽음을 보며 까닭 모르게 마음이 상해 있던 패왕에게는 거꾸로 그런 한왕 신이 적지 아니 위로가 되었다. 왠지 정직하고 올바른 패장(敗將)의 모습을 본다는 느낌이었다. 이에 패왕은 아직 굳어 있는 얼굴과는 달리 자못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왕은 어찌할 것인가? 주가의 무리를 뒤따르겠는가? 아니면 과인에게로 돌아오겠는가?”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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