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26>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3일 03시 1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왕, 아무래도 아니 되겠습니다. 항왕(項王)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 하루바삐 이 성고(成皐)를 벗어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성고성 안에 갇혀 있는 한왕 유방을 장량과 진평이 가만히 찾아보고 그렇게 권한 것은 패왕이 성을 에워싼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듯 그들에게 물었다.

“지난 사흘 항왕은 우리에게 화살 한 대 날려 보내지 않았소. 그런데 무엇이 그리 심상치 않단 말이오?”

“지난번에는 한 달 넘게 에워싸고 들이치고도 빼앗지 못한 형양성을 이번에는 사흘 만에 떨어뜨린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그 사이 단 한 명의 군사도 성을 빠져나와 우리에게 위급을 알리지 못한 것만 보아도 항왕이 얼마나 철통같이 형양성을 에워쌌으며 또한 얼마나 불같이 들이쳤는지 알 만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갑자기 이 성고성을 에워쌌으니 항왕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성을 에워싸고도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것 또한 항왕의 성정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무언가 형양성을 그토록 무참히 우려 뺀 무서운 힘을 다시 끌어 모으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제야 한왕도 으스스해진 듯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과인이 빠져 나가기도 어려울 것이오. 형양성처럼 이곳도 철통같이 에워쌌을 터인데 무슨 수로 이곳을 벗어난단 말이오?”

그러자 진평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물음을 받았다.

“저희들이 성안에서 양동(陽動)으로 초군을 속일 터이니, 대왕께서는 적이 짐작하지 못하는 곳으로 빠져 나가십시오.”

“저번에 형양성에 갇혔을 때도 항왕의 눈을 속이고 과인만 몸을 빼낸 적이 있소. 그런데 항왕이 또 속아주겠소?”

“방금 형양성에서 이기고 왔기 때문에 그리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군사를 움직여 동 서 남 세 성문으로 한꺼번에 치고 나갈 듯 법석을 떨면 항왕도 그냥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군사를 갈라 그 세 성문을 지킬 것인데, 그때 대왕께서는 등공(謄公)의 수레를 타고 북문으로 빠져 나가시면 됩니다.”

그래도 한왕은 진평의 계책이 미덥지 않은 듯했다. 여전히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북문 밖에는 적이 없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적이 있더라도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문으로는 관중으로 갈 수 있고, 동문으로는 조나라에 있는 대장군 한신을 찾아갈 수 있으며, 남문으로는 섭(葉) 완(宛)으로 가시어 구강왕 경포와 힘을 합칠 수 있으나, 북문으로 나가서는 대왕께서 의지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저희들이 동 서 남 세 성문에서 금방이라도 치고 나갈 듯 수런거리는데, 어찌 북문에 많은 군사를 갈라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북문으로 가볍고 빠른 수레를 골라 대왕만 태우고 가만히 빠져나간 등공이 잘 닦여진 관도로 직접 수레를 몰고 내닫는다면, 설령 적의 기마대가 뒤쫓는다 해도 전혀 걱정할 게 없습니다.”

진평이 다시 그렇게 대답했다. 거기까지 듣자 비로소 한왕도 장량과 진평이 짜낸 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알 수 없는 일이 더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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