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33>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11일 03시 0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왕께서 아무도 거느리실 수 없게 될 만큼 참혹한 꼴을 당했는지도….”

이번에는 장이도 자신 없는 듯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을 듣자 잠시 굳어 있는 듯하던 한신의 머리가 비로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고성은 깨어지고 대군은 함몰하여 한왕 홀로 남게 되었다….”

한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의 앞뒤를 헤아리고 재보았다. 이내 실상이 잡혀왔다.

(그렇다. 모든 장졸을 잃고 쫓기게 되면서 한왕은 내가 거느린 조나라 군사들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홀몸으로 내 진채를 찾아오게 되자 갑자기 나를 믿지 못하게 된 듯하다. 내가 거느린 5만 대군과 내 병략이 두려워 나름대로 나를 기습한 것이다. 내가 딴 마음을 먹을 틈을 주지 않고 내 병권을 빼앗으려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득 한신의 간담이 서늘해왔다. 그 기습의 적절하고도 신속한 방식 때문이었다. 한왕 유방은 상대편이 뜻하지 아니한 때와 곳으로 나아간다(出其不意)는 병법의 요체를 실로 절묘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객청에 모여 있다는 장수들을 생각하자 한신의 가슴은 더욱 섬뜩해졌다.

한신이 처음 한왕에게서 떨어져 나와 조나라로 떠날 때는 군사도 장수도 모두가 한왕에게서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신이 위(魏)나라에 이어 대(代)나라를 쳐부수면서 한왕은 한신에게 주어 보낸 장졸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꺼번에 몇 만씩 뽑아간 군사뿐만 아니라 장수들까지도 한왕에게서 받은 사람은 한신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렵 들어 병가(兵家)인 한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몇 번 있었다. 형양에 포위되어 있다가 겨우 몸을 빼 낙양으로 간 한왕이 기장(騎將) 관영에게 군사 몇 천을 주어 한단(邯鄲)으로 보낸 일부터가 그랬다. 제 코가 석 자라고, 패왕 항우에게 쫓겨 관중으로 달아나는 처지에 관영 같은 맹장과 기마대를 빼내 조나라로 보낸 게 병가의 이치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오창을 지키던 조참이 조나라로 쫓겨 오고 뒤이어 초나라 군사들로부터 용도(甬道)를 지키던 주발까지 패군(敗軍)을 이끌고 그리로 찾아왔다. 겨우 보름 사이에 풍패(豊沛)의 맹장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세 사람이 적지 않은 군사들과 함께 한신 아래로 몰려든 것이었다.

(나를 의심하면서도 홀몸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 관영과 조참, 주발 세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해도 한왕은 여느 군왕을 넘는 기지와 과단성을 갖춘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 세 사람에게 나를 찾아가게 한 것이 바로 한왕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오늘과 같은 날을 위한 대비였다면, 그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한신이 그렇게 혀를 차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사이 옷을 갖춰 입은 장이가 앞장서며 말했다.

“우리도 객청으로 가서 대왕을 뵙도록 합시다.”

그 말에 한신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긴 다리를 성큼성큼 내디뎌 장이를 앞서듯 하며 객청으로 갔다. 관영과 조참, 주발의 호위를 받으며 장수들의 배치를 대강 바꾸고 난 다음 한숨을 돌리고 있던 한왕이 객청으로 들어오는 한신과 장이를 보고 물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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