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다시 역상 곁에 섰던 장수가 종리매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끼어들었다.
“종리(鍾離) 장군은 이 몸을 잊으셨소? 한솥밥을 먹은 날이 적지 않은데 어찌 그렇게 무정하게 알은체도 않으시오?”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다 전포를 겨우 이겨내고 있는 듯 호리호리한 몸매를 보자 종리매도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마지못해 두 손을 모으며 말을 받았다.
“한왕의 꾀주머니(智囊)라는 자방 선생이 여기 계셨구려. 그렇다면 한왕도 이 낙양 성안에 있다는 말이오?”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해도 이미 심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역상 같은 맹장에다 장량같이 뛰어난 책사가 붙어 있어 일은 점점 고약하게 꼬여 간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장량의 대답이 한술 더 떴다.
“이 성은 원래 나와 진평이 만여 군민(軍民)과 더불어 지키고 있었으나, 우리 대왕께서 장군이 이리로 오실 줄 알고 벌써 며칠 전에 역((력,역)) 상국(相國·그때 역상의 신분은 양나라 재상이었다)과 상장군 주발에게 대군을 딸려주시며 우리를 돕게 하셨소. 이에 진평과 주발은 공현(鞏縣)을 지키러 가고 나와 역 상국만 여기 남았소. 우리 대왕은 역 상국의 말대로 조나라에 있는 대장군 한신의 진채에 머물고 계시오. 머지않아 항왕과 크게 보수전(報수戰)을 벌이리라 벼르고 계시오.”
그 말을 듣자 종리매는 맥이 죽 빠졌다. 조금 전까지의 드높던 기세는 다 어디 가고 오히려 자기가 한군의 계략에 말려든 것 같아 불안해졌다.
종리매의 마음가짐이 그와 같으니 이어지는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왔다가 아무 얻은 것 없이 돌아갈 수가 없어 몇 번 성을 치는 흉내는 냈으나, 그 끝이 뻔했다. 헛되이 군사만 꺾이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장량과 진평이 성을 나와 뒤쫓지 않는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하수(河水) 북쪽 길을 잡아 한왕을 뒤쫓던 용저도 마찬가지였다. 하수를 건너 공현까지는 거침없이 달려갔으나 그 다음은 낙양성의 종리매와 비슷했다. 풍패(豊沛)의 맹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주발이 이미 대군을 이끌고 와 있는 데다, 독한 꾀로 이름난 진평이 곁에서 주발을 거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왕 항우는 믿고 보낸 종리매와 용저가 낙양과 공현을 잇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원병을 청해 오자 불같이 화가 났다.
“이는 틀림없이 한왕 유방이 관중으로 달아났다는 증좌이다. 유방이 거기서 마지막 발악을 하기 때문에 종리매와 용저가 낙양과 공현에서 더는 서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단정하고 다시 대군을 휘몰아 서쪽으로 가려 했다. 그때 멀리 동쪽으로 나가 있던 척후로부터 급한 전갈이 들어와 다시 한번 패왕의 부아를 질러놓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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