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41>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8월 20일 03시 03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참으로 군사를 부리기에 좋은 철이다….’

한(漢) 3년 9월 패왕 항우는 성고성 문루에서 맑은 가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며칠을 쉬자 형양성과 성고성을 잇달아 떨어뜨리느라 쌓인 피로는 말끔히 가시고 없었다. 거기다가 사람을 보내 뒤쫓고 있는 한왕 유방이 제 발로 오고 있다는 소문에 패왕은 벌써 온몸이 근질거렸다. 다시 사람을 동쪽으로 보내 그 말이 맞는지를 알아보게 하였지만 머릿속은 벌써 거침없는 전의(戰意)로 가득했다.

그때 동쪽에서 기마 한 필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전날 소수무 쪽에서 오고 있다는 유방의 움직임을 살피러 갔던 탐마(探馬) 같았다. 패왕이 성문을 열어주게 하자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사졸 하나가 말에서 뛰어내려 군례를 올린 뒤 말했다.

“동쪽에서 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한왕 유방의 대군입니다. 한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에다 소하가 관중에서 뽑아 보낸 군사를 보태 스스로 10만 대군을 일컫는데 엄청난 기세였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대왕과 자웅을 가르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은 벌컥 화부터 치밀었다. 그 무렵부터 울화와 격분은 차츰 패왕의 고질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한왕 유방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풀이해 쓰는, 패왕이 보기에는 한없이 비겁하고 지저분한 술책 때문이었다. 패왕이 잠시라도 군사력을 집중하려 들면 그들은 그 바람에 비어 있는 곳을 제 땅인 양 마구 휘젓고 다니다가, 패왕이 달려가기만 하면 참새 떼처럼 흩어져 달아나 그 군사적 자부심과 자신감에 상처를 입혔다.

“유방 그놈이 또 더러운 잔꾀를 부리고 있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면 틀림없이 어딘가로 내뺄 궁리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꼬리를 사리고 멀리 달아나 숨기 전에 우리가 달려가 그 쥐새끼들을 모두 때려잡자.”

패왕이 화를 못 이겨 그렇게 소리치며 제 편에서 군사를 움직이려 했다. 그때 계포가 나서 조심스레 말렸다.

“대왕 고정하십시오. 유방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구태여 장졸을 수고롭게 하며 우리가 찾아 나설 까닭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방이 들고 나는 방식을 살피면 어떤 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힘에 부치면 비겁하게 달아나지만, 그래도 때를 넘기지 않고 반드시 되받아쳐 왔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거느린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 듯한데,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더 밀리면 실망한 장졸들이 모두 흩어져 버릴 것이니 이판사판으로 나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패왕이 성난 가운데도 듣고 보니 계포가 하는 말이 옳은 듯했다. 한왕 유방은 파촉(巴蜀) 한중(漢中)에서 나온 뒤로도 벌써 네댓 번이나 여지없이 지고 쫓겨 갔지만, 한 달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어딘가로 반격해 왔다. 패왕이 가만히 헤아려 보니 이번에도 유방 스스로 앞장서 되받아치는 시늉을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좋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방을 기다리기로 하자. 촘촘하고 질긴 그물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이번에는 반드시 유방을 사로잡자!”

그러면서 성고에서 유방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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