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역이기의 큰소리에 한왕이 너털웃음을 치며 받았다.
“좋소. 그리 해보시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마솥에 삶겨서는 아니 되오.”
“그렇다면 먼저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잠시 제나라로 쳐들어가는 일을 멈추라 하십시오. 창칼을 쓰는 일은 말로 달래 본 뒤라도 늦지 않습니다.”
“번거롭게 사람을 따로 한신에게 보내느니, 그 일도 선생께서 해주시구려. 여기서 제나라 도읍 임치(臨淄)까지는 2000여 리, 길이야 바로 제나라로 들면 조금 줄일 수도 있지만 밤이 길면 사나운 꿈도 많은 법이오. 너무 일찍 우리 사신이 제나라로 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선생께서는 먼저 한단(邯鄲)으로 가보시면 어떻겠소? 그곳에 있는 한신과 장이에게 선생께서 직접 과인의 뜻을 전하고 하수(河水)를 건너 제나라로 들어가면, 임치까지 가는 길 절반은 우리 군사들이 차지하고 있어 안전한 조나라를 거쳐 가게 되는 셈이오. 거기서 동아(東阿)와 역성(曆城)을 거쳐 임치로 들면 별탈 없이 제왕을 만날 수 있을 것이외다.”
이에 역이기는 한왕의 말을 따라 그날로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먼저 자신이 탈 수레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데다 덮개가 있고 휘장까지 드리운 것으로 골랐다. 그리고 그 수레 앞뒤에는 번쩍이는 마구(馬具)를 갖춘 기마 몇 기(騎)와 키 크고 허여멀쑥한 갑졸(甲卒)들에게 크고 작은 깃발을 나눠주고 따르게 함으로써 위의(威儀)를 갖추었다. 하지만 따르는 사람이 모두 합쳐 서른을 넘지 않게 해 누가 보아도 싸우러 오는 사람들 같지는 않게 했다.
역이기가 한단에 이르렀을 때 상국(相國) 한신은 제나라를 치기 위해 군세를 키우는 데 한창이었다. 한신이 소수무에서 쫓겨오듯 하며 한왕으로부터 받아 온 군사는 3000을 채우지 못했다. 천하의 패왕 항우도 끝내 꺾지 못한 제나라를 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군사였다.
하기야 그때 한신 곁에는 조참과 관영이 각기 적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와 있었다. 그러나 조참은 한나라 우승상(右丞相)으로 조나라 상국인 한신보다 오히려 벼슬이 높았다. 조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군사를 한신의 뜻대로 부릴 수는 없었다. 또 관영은 명목상으로는 한신에게 배속되어 있었으나, 낭중(郎中)의 기마대를 이끈 기장(騎將)으로서 실제로는 한왕 유방에게 직속된 별장(別將)이었다. 따라서 제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한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군사가 훨씬 더 많이 있어야 했다.
이에 한신은 조왕(趙王)으로 가임(假任)된 장이를 내세워 조나라 장정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한신과 장이는 전에도 조나라에서 적지 않은 군사를 거둬 한왕에게 보낸 적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조나라는 땅이 넓고 기름진 만큼이나 군사로 뽑아 쓸 수 있는 장정도 많았다. 백성들을 어르고 달랜 끝에 그럭저럭 1만여 명을 긁어모을 수가 있었다.
역이기가 한단으로 간 것은 한신이 그렇게 긁어모은 장정들이라도 정병(精兵)을 만들어 제나라로 가보려고 한창 조련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군사로 부릴 만하다 싶을 때 역이기가 찾아와 제나라로 군사를 내지 말라는 한왕의 뜻을 전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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