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전횡(田橫)이 힘으로 제나라를 차지한 뒤에 왕으로 세우기는 했지만, 제왕(齊王) 전광도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 힘으로 삼제(三齊)를 아울러 왕이 된 아비 전영(田榮)을 닮아 생김이 헌걸찰 뿐만 아니라 사람됨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역이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강 짐작한 듯 제왕이 덤덤하게 받았다.
“천하가 어지러우니 당연히 그럴 것이오. 실은 그 때문에 과인도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소.”
그 말에 역이기가 다시 딴전을 펴듯 불쑥 물었다.
“왕께서는 천하가 마침내 어디로 돌아갈지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소. 그것만 알아도 과인의 걱정이 절반은 덜어질 것이오.”
이번에도 제왕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역이기가 좀 더 속을 드러냈다.
“그렇습니다. 왕께서 만일에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몰리게 될지를 아신다면 제나라는 온전하게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아시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끝내 지켜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선생이 보시기에는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 것 같소?”
제왕이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제야 역이기도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반드시 한나라와 우리 대왕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선생은 어째서 그렇게 잘라 말하시는 것이오?”
“지금 우리 대왕과 함께 천하를 다툴 만한 세력은 항왕이 다스리는 서초(西楚)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대왕이신 한왕과 서초 항왕의 사람됨을 살펴보면 곧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왕과 항왕의 사람됨 가운데서 먼저 따져볼 것은 신의(信義)입니다. 지난날 한왕과 항왕은 다 같이 의제(義帝)의 신하로서 서로 힘을 합쳐 진나라를 치되, 먼저 함양(咸陽)으로 들어가는 쪽이 관중의 왕이 되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왕이 먼저 함양에 들어가자 항왕은 약조를 저버리고 한왕에게 관중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궁벽한 파촉(巴蜀)과 한중(漢中)만을 떼어내 주며 한왕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신하되어 마땅히 바쳐야 할 충성입니다. 항왕은 겉으로는 섬기던 임금 회왕(懷王)을 높여 의제로 세웠으나, 속으로는 오직 임금을 해치고 홀로 우뚝할 마음뿐이었습니다. 의제를 재촉해 멀리 외진 장사(長沙)로 내쫓은 뒤 끝내는 형산왕과 임강왕을 시켜 시해(弑害)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파촉 한중의 군사를 이끌고 삼진(三秦)을 쳐부순 뒤에 함곡관을 나와 항왕이 의제를 시해한 죄를 따졌습니다. 천하의 군사를 불러 모아 항왕의 도읍인 팽성을 들이쳤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임금 되는 옛 제후들의 후예를 찾으면 다시 제후로 세워주었습니다….”
역이기가 그렇게 말하고는 한 차례 숨을 고른 뒤에 이었다.
글 이문열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