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8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7일 03시 10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항양이 남은 500명과 더불어 수십 채의 수레를 보호해 10리쯤 가는데 다시 한나라 군사들이 따라붙었다. 뒤쫓는 쪽도 노리는 바가 있어서인지 악착스러운 데가 있었다.

“할 수 없다. 금옥과 화뢰(貨賂)를 실은 수레를 버려라. 적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어지러운 틈을 타 패왕께서 맡기신 사람이나 보존하자.”

항양이 그렇게 명을 내려 재물을 실은 수레를 버리게 했다. 한 젊은 부장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대왕의 가솔이랬자 겨우 당내(堂內)에나 들 정도로 먼 종성(宗姓)들뿐입니다. 거기다가 별것 아닌 시중들과 시녀들이 있을 뿐인데, 그들을 구하려고 저 많은 재보를 흩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대왕께서는 함께 눈비를 맞으며 싸운 맹장들보다도 우리 항씨(項氏) 종친들을 더 믿고 아끼신다. 거기다가 저기 저 수레에 탄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미인(美人)으로 봉해진 우희(虞姬)가 저 수레에 타고 있다. 우 미인을 도읍 팽성에 두는 것도 못 미더워 군막과 함께 옮겨 다니게 하고 있는데, 그녀를 한왕에게 뺏기고 무슨 수로 대왕께 용서를 구하겠느냐?”

항양이 나무라듯 그 젊은 부장의 말을 받았다. 젊은 부장도 수레에 탄 사람 가운데 우 미인이 있다는 말을 듣자 더는 군소리 없이 항양이 시키는 대로 했다. 군사들로 하여금 재물 실은 수레 수십 대를 버리게 해 뒤쫓는 적 기마대의 길을 막는데, 일부러 수레를 뒤집거나 보화가 담긴 궤짝을 열어젖혀 보는 사람에게 절로 물욕이 일도록 했다.

머지않아 그곳에 이른 한나라 기마대는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수레 수십 채가 길가에 나뒹굴고 있는 걸 보자 눈이 뒤집혔다. 항양을 뒤쫓는 것도 잊고 저마다 말에서 내려 닥치는 대로 금은보화를 거두었다. 이어 그들의 뒤를 받치는 한나라 보졸들이 이르렀으나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졸과 기마대가 뒤엉켜 수레와 함께 버려져 있는 재화를 다투었다.

한왕이 이끈 중군이 그곳에 이른 것은 재물에 눈이 먼 한나라 장졸들이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한왕은 그런 장졸들을 꾸짖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뒤 형양성으로 달려갔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새 항양이 이끈 인마와 수레는 종리매가 끌고 나온 대군의 호위를 받으며 형양성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

한왕은 대군을 풀어 형양성을 에워싸게 하고 낮에 군사들이 나눠 가진 패왕의 금은보화를 모두 거두어들이게 했다. 군사들이 감춘다고 감추었으나 그래도 거둬 놓고 보니 엄청난 재화였다. 그걸 보며 한왕이 탄식하듯 말했다.

“과연 말로만 듣던 패왕의 재보답구나. 군막에 싣고 다니는 금은보화가 이 정도이니 그가 천하에서 거둔 것을 다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된다는 것이냐.”

그리고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내 듣기로 항왕은 아직 격식을 갖춰 혼인한 적이 없다 하였다. 그런데 무에 그리 소중한 가솔이 있어 항양이 저 많은 재보를 흩뿌리면서까지 그들을 구해냈다는 것이냐?”

그때 곁에 있던 장량이 가만히 웃으며 받았다.

“대왕께서는 옛날 함양 궁궐에서 만났던 우씨(虞氏) 성 쓰는 소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그 같은 장량의 물음에 한왕은 까닭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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