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88>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17일 03시 10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성고가 떨어지다니? 대사마 조구는 어찌되었느냐? 과인이 떠나올 때 적지 않은 군사를 남겨 주고 사마흔과 동예까지 붙여 주었거늘.”

전갈을 가지고 달려온 군사에게 패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형양의 종리매에게로 몸을 피한 항양이 보낸 그 군사가 구성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사마께서는 목을 찔러 자결하셨습니다. 전 새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사마를 뒤따랐습니다.”

“과인이 떠나올 때 조구에게 성안에서 굳게 지키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도 그런 꼴을 당했다는 것이냐?”

들을수록 기막히고 분통이 터지는지 패왕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한왕이 군사들을 시켜 대사마께 며칠이나 계속 욕을 퍼붓게 하다가, 갑자기 사수(5水)가로 물러나 글로 다시 대사마를 꾀어냈습니다.”

“대사마나 사마흔에게 있던 서생 기질이 끝내 일을 그르쳤구나. 어서 군사를 돌려라! 내 이 엉큼하고 능글맞은 장돌뱅이 놈을 반드시 사로잡아 목 베어야겠다.”

패왕이 더 참지 못해 칼을 짚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러다가 잊고 있었던 것을 문득 기억해낸 듯 물었다.

“그렇다면 성고성 안에 있던 사람과 물자는 어찌 되었느냐?”

그러나 패왕의 목소리에는 진작부터 궁금히 여겨온 것을 억눌러온 침중함이 느껴졌다. 그 군사도 패왕이 정작 무엇을 궁금해 하는 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대사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성 안에 있던 항양 장군에게 전갈을 보내 사람과 재물을 형양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대왕의 가솔과 행궁(行宮)의 사람들은 모두 형양성으로 옮겨 종리매 장군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군사가 그래놓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패왕의 얼굴이 알아보게 펴지는 것을 보고 다시 조심스레 이었다.

“추격이 워낙 다급하여 금은과 화뢰(貨賂)가 실린 수레는 모두 한나라 군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다시 벌컥 화를 내며 그 군사를 노려보던 패왕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목소리를 풀었다.

“재보야 다시 되찾아오면 된다. 내 당장 달려가 그 흉물스러운 장돌뱅이를 죽이고 빼앗긴 재보를 되찾으리라.”

그러고는 장졸들을 군막으로 불러 모아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게 했다.

다음 날 패왕을 따라 팽월을 잡으러 왔던 초나라 군사들은 일껏 차지한 열일곱 개의 성을 내놓고 다시 성고로 돌아갔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가기 위해 짐 될 만한 것은 모두 버리니, 대군이 먹을 곡식도 닷새치를 넘지 못했다. 곡우(曲遇)에 이르기도 전에 종리매가 보낸 사자가 달려와 다시 급한 소식을 알렸다.

“성을 에워싼 한군의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이르시기 전에 성이 깨지는 낭패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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