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92>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21일 03시 08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서광무(西廣武)는 무엇이며 혈창(穴倉)은 무엇인가? 또 산봉우리가 높아도 치고 올라가면 될 것이고, 산성이 가로막아도 깨뜨리면 그만이다. 그 험한 함곡관도 쳐부수고 넘었는데, 지리(地利)는 무슨 놈의 지리냐?”

패왕이 완연히 심기가 상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그래도 계포는 물러나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대왕께서도 아시듯 광무산은 오창 서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삼황산(三皇山)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서 두 개의 봉우리 가운데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서광무라 하며, 번쾌가 지키는 산성은 그 중턱에 있습니다. 또 서광무 서쪽 등성이에 땅을 파 만든 큰 곡식창고가 여럿 있는데 이를 혈창이라 합니다. 진나라 때부터 오창에 모인 곡식을 옮겨 갈무리하던 곳입니다. 신이 지리를 말한 것은 동서 광무가 깎아지른 듯한 광무간(廣武澗)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데다, 그 바닥에는 변수((변,판)水)라는 물까지 흐르고 있어 병진(兵陣)을 펼쳐볼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포가 젊은 날 임협(任俠)으로 떠돌며 익힌 지리를 바탕으로 그렇게 자세히 일러 주자 패왕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성난 기색이 조금 가신 얼굴로 계포에게 다시 물었다.

“광무간이 그렇게 좁고 험하다면 다른 기슭으로 서광무를 치면 되지 않겠는가?”

“서광무의 다른 삼면은 전면이 넓은 데다 비탈이 가팔라 위에서 지키기에는 좋고 아래에서 쳐 올라가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산 위에 흔해 빠진 바위만 굴려대도 나무꾼 하나가 날랜 군사 열 명을 막아낼 수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거기다가 조금 비탈이 덜한 곳은 높은 산성과 혈창의 누벽(壘壁)이 막고 있습니다. 함부로 얕볼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먼저 형양성으로 드신 뒤에 형세를 면밀히 살펴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계포가 거기까지 말하자 부근의 지리를 잘 아는 다른 장수들도 용기를 내어 계포의 말을 뒷받침해 주며 은근히 패왕을 말렸다. 어느새 저물어 가는 동짓달의 짧은 해도 패왕의 서두름을 달랬다. 거기다가 저만치 형양성이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떠올리게 된 우미인(虞美人)의 모습이 불현듯이 욕망과 함께 패왕을 성 안으로 잡아끌었다.

형양성 안으로 들어간 패왕은 갑주와 전포를 벗고 그동안 덮어쓴 싸움터의 먼지를 씻어내기 바쁘게 술상과 함께 우미인을 불러들이게 했다. 오래잖아 패왕의 성품에 맞게 차린 소박한 술상이 먼저 나왔다. 패왕이 즐기는 고기 몇 접시에 독한 술 한 동이, 큰 잔 하나가 놓인 술상이었다. 이어 역시 그 술상처럼 소박하게 단장한 우미인이 나와 가볍게 아미를 숙인 뒤 상머리에 앉았다. 알아볼 듯 말 듯 은은한 화장에 패왕이 좋아하는 색깔과 모양으로 지은 옷이었다.

“따르라.”

패왕이 큰 잔을 내밀며 말했다. 우미인이 말없이 국자를 들어 술 한 잔을 따르고 다시 그림자처럼 앉아 그윽하게 패왕을 올려보았다. 목마른 사람처럼 국대접만 한 술잔을 단숨에 비운 패왕이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걱정하였다.”

그리고 힐끗 우미인을 건네본 뒤 패왕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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