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 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그것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모자(母子)는 달랐다. 납북(拉北)됐던 동진호 선원 아들을 18년 만에 만나 오열하는 늙은 어머니. 이 모자의 만남은 내 부모가 살아생전에 전쟁통에 헤어졌던 북의 형제자매와 만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동진호는 1987년 1월 15일 서해 백령도 부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납북됐다. 그 배에 탔다가 납치됐던 선원이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아니다. 북한이 자행한 폭압적 인권 유린과 그것에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눈치 보기에 급급한 채 마냥 끌려만 가고 있는 남한 정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비극일 뿐이다.
현재 정부가 생존을 추정하고 있는 납북자는 485명, 국군포로는 546명. 그러나 북한은 이들의 송환을 위한 협상은커녕 생사(生死) 및 주소 확인조차 외면하고 있다. 북한은 “의거 월북자만 있을 뿐 국군포로나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없는데 무슨 생사, 주소 확인이냐는 억지다. 그러나 북한의 억지는 1994년 조창호 소위를 필두로 58명의 국군포로와 1975년 오징어잡이 어선 천왕호에서 조업 중 납북됐던 고명섭(62) 씨 등 4명의 납북자가 잇따라 탈북해 입국(2005년 10월 말 현재)함으로써 명백한 거짓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중 극소수를 가뭄에 콩 나듯이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합류시키고 있다. 그 정도라도 감지덕지하라는 태도인데 남한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가는 형국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최근 남파간첩이었던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문제에 대해 “인도주의적 인권적 인간적 도리 차원에서 희망자에 대해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상자는 29명. 이들을 모두 북송한다면 1993년 이인모 씨에 이어 2000년 9월 63명을 북송한 것과 합해 모두 93명을 북에 보내는 것이다. 물론 이들을 구태여 남쪽에 잡아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북한은 생사 확인조차 거부하는데 남한만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가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된 정부라면 정정당당하게 협상을 요구하고 송환의 원칙을 관철시켜야 한다. 그것이 납북자와 국군포로에 대한 인도주의적 인권적 인간적 도리이자 제 나라 국민에 대한 책무다.
납북된 동진호 어로장 최종석 씨의 딸 우영(35) 씨는 얼마 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공개편지를 써 아버지의 송환을 간청했다. 그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 환갑인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에 있다고 하고 위독하다고도 해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아무리 부탁해도 무엇 하나 밝혀 주는 게 없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김 위원장 앞으로 편지를 썼지요.”
편지를 쓴 우영 씨는 임진강변 소나무에 노란 손수건 400장을 걸어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염원했다. 애틋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용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새문안교회는 20일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을 기도하는 ‘희망의 노란 리본 달기’ 행사를 갖기로 했다. 서울 강서구 방화1동의 화평교회는 지난달 말부터 ‘노란 손수건 매달기 운동’을 펴고 있으며, 앞으로 전국의 교회와 연대해 이 운동을 넓혀 갈 계획이다. 경남 양산에서 국밥집을 하는 조성백(48) 씨는 사흘 전부터 손님들에게 노란 띠를 나눠 주며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천륜(天倫)을 갈라놓는 북한에 분노하는 손님들이 하나 둘 노란 띠를 가로수에 매달고 있습니다. 하루 만에 50개 넘게 매달렸지요.”
우영 씨는 오늘밤도 아버지가 탄 동진호가 노란 손수건을 뱃머리에 달고 남으로 내려오는 꿈을 꾸지 않을까.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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