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47>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2월 24일 03시 0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천하는 모두가 함께 쓰는 물건이라고 들었다. 구이(九夷)에게인들 천하가 다르랴. 항왕의 포악한 다스림으로부터 함께 지켜내야 할 것이다. 그러하되 만약 북맥(北貊)과 연나라의 효기(梟騎)가 와서 과인을 도운다면 그것은 모두 진(陳) 호군의 가르침 덕분이다.”

한왕은 그렇게 말하며 진평이 시키는 대로 사신을 흩어 보내게 했다. 장량도 한왕이 제쳐놓고 있던 군세 한 갈래를 깨우쳐 주었다.

“이미 한(韓)나라에서 관중으로 쳐들어갈 적은 없으니 왕릉(王陵)도 무관(武關)에서 불러내도록 하십시오.”

왕릉은 한왕과 같은 패현(沛縣) 사람으로 한왕이 저잣거리 건달 유계(劉季)였던 시절에는 형으로 모신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뒤에 패공(沛公)이 되어 그를 불렀으나 그 밑에 들기를 마다하다가, 패공이 한왕이 되어 패왕 항우를 치러 함곡관을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무리를 이끌고 한왕을 따랐다. 왕릉이 한왕을 위해 먼저 하게 된 일은 가만히 풍읍(豊邑)으로 가서 태공 내외와 한왕의 가솔들을 구해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패왕이 알고 그 어머니를 인질로 잡은 뒤 왕릉을 제 편으로 불렀다. 놀란 왕릉이 패왕에게 사자를 보내 어머니를 만나 보게 하였으나, 그 어머니는 오히려 사자 앞에서 목을 찔러 왕릉에게 한왕을 섬기도록 권했다. 이에 왕릉은 태공 내외와 한왕의 가솔을 보호해 관중으로 들어갔다.

한왕은 왕릉의 장재(將材)를 높이 치고, 그 어머니의 일을 안타깝게 여겨 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옛적과 아래위가 바뀐 사이의 어색함이 있는 데다, 왕릉은 또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옹치(雍齒)와 몹시 친한 터라 곁에 두고 부리기가 마땅치 않았다. 한왕 막하에 들기는 하였으나 한왕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하고 겉돌기는 왕릉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한왕은 왕릉에게 군사 1만을 주고 무관(武關)에 머물러 한(韓) 땅으로부터 관중으로 침입해 오는 적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는 한왕(韓王) 신(信)이 패왕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뒤로는 줄곧 한왕 유방의 세력 아래 있어 무관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알겠소. 이번에는 왕릉도 불러내 쓰도록 하겠소.”

진평 때문에 귀가 열린 한왕은 장량의 말도 기꺼이 따랐다. 사람을 무관으로 보내 왕릉과 그 군사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여름 6월에 먼저 왕릉이 1만 군사를 이끌고 무관을 나와 광무산 아래에 이르렀다. 왕릉은 오창 남쪽에 새로 진채를 세워 서(西)광무에 있는 한왕의 진채와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루게 했다. 그 사이에 번쾌가 지키는 산성이 있어 한왕의 진채는 이제 한 겹 두꺼운 철갑을 더 두른 듯했다.

가을 7월에는 경포(경布)가 떠들썩하게 회남왕(淮南王)에 올라 새로운 기세로 구강 땅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초나라 대사마 주은(周殷)이 경포를 잘 막아내고 있었으나, 한왕 유방이 사신을 보내 경포를 왕으로 삼자 경포를 보는 구강 사람들의 눈길이 달라졌다. 거기다가 다시 양 땅에 있는 장군 유고(劉賈)까지 구강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민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8월에는 북맥의 효기 3000이 달려와 한나라 진채에 들었다. 연왕(燕王) 장도를 따르지 않는 무리 5000도 기마를 갖춰 한왕을 찾아와 돕기를 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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