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뒷사람들에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한나라와 초나라 양군 사이의 그와 같이 길고도 지루한 교착(膠着)이다. 그 열 달 남짓 한왕은 곧 죽어가는 시늉을 하고, 때로는 온 세상이 다 들을 만큼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끝내 서(西)광무를 끌어안고 있었다. 패왕은 패왕대로 금세라도 전군을 들어 서 광무를 때려 엎을 듯한 기세였지만, 동(東)광무를 버리고 한왕과 결판을 내려들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런 외형과는 상반된 그 교착의 결과였다. 언제나 밀리고 쫓기면서도 그 열 달 한왕은 실상 사방에 자기 사람을 풀어 천하를 주무르고 있었던 셈이었고, 기세는 요란해도 패왕은 그 사이에 손발 같고 날개 같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꺾이며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왕을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움을 넘어 어떤 불길한 주술에라도 걸려든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이해 안 되는 패왕의 주저와 부동(不動)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이나 기록은 일쑤 이긴 쪽에 유리하게 편성된다. 거창하게 역사를 승자의 전리품이라고 단언하지 않아도, 그와 같은 시대감정이 역사에 착색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사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마천의 엄정한 붓끝도 다 드러내지 못한 그 시대의 진상은 있을 것이고, 뒷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행간(行間)에서 그걸 읽어내야 한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보면 패왕 항우는 전투에는 타고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걸 잃지 않았던 듯하다. 따라서 패왕이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부나 자기 무오류(無誤謬)의 고집에 갇혀 자기도 모르게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때 패왕을 돌이키기 어려운 국면으로 몰아간 주저와 부동은 유별나게 뛰어난 전투감각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광무산에서 서로 견고한 진채를 세우고 맞서게 되면서부터 패왕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상태가 자신에게 유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때문에 패왕은 여러 번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때 이미 패왕의 전투력은 개별적인 전투에서도 한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패왕 쪽에 기회가 있었다면 양 땅에서 팽월을 멀리 쫓고 돌아온 처음 한 달 안팎이었다. 그때는 이기고 돌아온 기세에다 후방의 안전과 양도(糧道)가 확보되어 들판에서의 전면전이었다면 패왕은 한왕의 대군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한왕은 서광무에 견고한 진채를 세워 급전(急戰)을 피하고 싸움을 지루한 진지전(陣地戰)으로 이끌었다.
그 다음으로 패왕에게 다시 기회가 있었다면 한왕 유방을 유인해 쇠뇌로 가슴을 맞혔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한왕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해 한나라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또 패왕이 그걸 알아차려 맹렬하게 치고 들었다면, 일시적 우세를 넘어 철저하게 한군을 쳐부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왕은 교묘한 연출로 한군의 동요를 막았고, 패왕까지 속여 위기를 넘겼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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