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65>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철은 늦은 가을 9월도 하순이라 벼농사가 많은 오초(吳楚) 땅이라면 한창 쌀이 넉넉할 때였다. 아직 벼농사가 그리 많지 않은 하남(河南)이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뒤여서 어디든 뒤지기만 하면 군사들을 먹일 것이 넉넉하게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종리매가 아무리 군사를 풀어 부근 인가를 뒤져도 군량을 제대로 거둘 수가 없었다.

초나라 군사들이 광무산 부근에서 곡식을 거두기 어렵게 된 것은 두 나라가 거기서 일년 가까이나 대치하며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백성들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약한 것은 민심까지 초나라를 떠나 곡식이 있는 백성들도 선뜻 내놓으려 하지 않는 일이었다. 군량이 넉넉한 한군(漢軍)에 비해 언제나 굶주리는 초군(楚軍) 쪽은 자주 무자비한 약탈로 군량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부근 백성들로 하여금 초군을 원수 보듯 하게 만든 탓이었다.

“가자. 조금만 더 참아라. 팽성에만 가면 쌀밥과 고기로 너희를 배불리 먹여주겠다.”

패왕은 광무산을 내려와서도 여전히 굶주린 장졸들을 그렇게 달래며 군사를 동쪽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초나라 대군이 박랑(博浪)에 이르러도 군량다운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팽월의 무리가 출몰하는 양(梁) 땅으로 접어들자 형세는 급속하게 나빠졌다. 무리를 지어 진채에서 빠져나가는 군사들이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초나라 군사들이 무리지어 달아난 일은 광무산에서도 있었다. 처음에는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 몇 명씩 한나라 진채로 넘어가더니, 나중에는 옹치(雍齒) 같은 장수까지 수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가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양 땅에서처럼 하룻밤에도 수백 명씩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싸움에 져서 쫓기는 것도 아니고, 팽월이 대군으로 길을 막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된 굶주림과 막연한 불안만으로 군사들이 초나라의 깃발 아래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개는 산동이나 하북(河北)에서 패왕의 위세를 보고 따라붙은 유민(流民)들이라 강동(江東)에서 따라온 용사들과는 견줄 수 없었으나, 아침마다 군사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패왕은 참을 수가 없었다.

“까닭 없이 진채에서 달아나거나 대오에서 빠져나가는 자는 모두 목을 벤다!”

패왕은 불같이 성이 나서 그렇게 엄명을 내렸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길한 예감도 없지 않았다. 초나라 장졸들을 재촉해 팽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더욱 서둘렀다.

그때는 한군도 관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한왕은 패왕의 대군이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광무산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광무 산성(山城)에서 번쾌가 이끄는 군사들이 내려오고 왕릉(王陵)의 군사들도 한왕과 합세했다.

하룻밤이 지나자 다시 주발이 오창(敖倉)을 지키던 군사들을 이끌고 따라온다는 전갈이 왔다. 거기다가 관중에서 소하가 뽑아 보낸 1만 군사가 다시 이르러 한왕의 군세는 며칠 사이에 10만으로 부풀어 올랐다.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북맥(北貊) 기마대와 연나라 군사들이 그제야 머뭇거리며 각기 제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장량이 그들을 말려 놓고 진평을 찾아가 말했다.

“진(陳)호군은 나와 함께 대왕을 찾아보지 않겠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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