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잘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하고 있으니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한탄했던 인간 불평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시대에 그것은 부의 격차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득수준 상위 5%에 들려면 연봉 2억 원으로 가능하지만 이 5%의 부자들 가운데서 다시 상위 5%에 들려면 2000억 원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 부자 집단 내에서도 부의 격차는 이토록 크다. 모두가 함께 풍요롭게 사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꿈이었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근대 200년간의 경제역사가 증명한다. 세계 각국 정부가 (표를 얻으려는 목적 때문에도) 부와 빈곤의 양극화 해소에 노력했지만 유엔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최근 20년 사이에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빈부 격차는 더 커졌다. 이 문제에 관해 특효약은 고사하고 과연 해법이라도 존재하는 건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정부가 승산 희박한 이 모험적 과제에 도전장을 낸 것은 용감한 일이라 하겠다. 정권이 양극화 상황의 악화를 막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이해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경계해야 할 것은 양극화에 관한 잘못된 인식과 맹목적 평등주의에 대한 집착이다. 수천억 재산가의 빌딩 옆 지하도에 노숙인이 있는 것은 분명히 양극화의 한 모습이다. 노숙인의 빈곤은 사회가 해결해야 할 한쪽 극이지만 그렇다고 반대쪽의 큰 부자도 함께 없애야 할 나쁜 극은 아니다. 부자가 돈을 긁어 가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이 굶주리게 되는 것이라면 빌 게이츠가 있는 미국의 서민은 그런 부자가 없는 평양의 서민들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 논리에서 빈부 격차(양극화) 해소보다는 빈곤 퇴치라는 말이 더 합리적이다. 윌리엄 번스타인은 ‘부의 탄생’이라는 저서에서 19세기 이후 선진국들이 빈곤을 퇴치할 수 있었던 4요소를 적시했는데 그중 2개가 ‘명확한 재산권 확립’과 ‘대규모 자본의 존재’였다. 대자본 덕분에 천재적 아이디어가 경제적 실재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빈곤을 퇴치하는 자본주의적 선택은 부자들이 더욱 부유해져 아랫목의 온기가 차가운 윗목으로 퍼지게 하는 것일 수 있다.
투입되는 자본에 비해 소득이 더 클 때 경제정책은 그 가치가 인정된다.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붓고도 빈부 격차가 현저하게 해소되지 못하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결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기 마련인데 20세기 이후 공산사회주의 정권을 받아들인 몇몇 나라가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선진국 정부들이 섣불리 이 문제에 달려들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정권이 양극화 해소를 들고 나온 시점이다. ‘숙원 사업’이었다면 왜 출범 초에 이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지 않았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때보다 다음 선거 때까지의 시간적 거리가 훨씬 짧아진 지금에야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순수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정치적 목적으로 도입된 경제정책의 후유증을 수도 없이 경험했기에 노 대통령의 양극화 해소 선언을 우리는 예의 주시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정책이 드러나는 시점에서 국민은 이 정권의 성격과 진면목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이 다음에 어떤 정권을 선택할지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이규민 경제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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