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80>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2월 2일 03시 14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누가 우리 대왕을 핍박하느냐? 어서 무례한 손길을 멈추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달려와 한왕을 에워싸고 있던 초나라 기병들을 쫓아 버린 장수는 뜻밖에도 왕릉이었다. 장량과 진평이 졸라 왕릉을 후진(後陣)으로 남기고 어려울 때 대군이 의지할 진채나 얽게 하였는데, 때맞춰 구원을 나온 셈이었다. 한왕이 너무 반갑고 고마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왕형(王兄), 고맙소. 실로 옛적과 다름없이 무리의 큰형다운 식견과 짐작이오.”

옛날 패현 저잣거리에서 왕릉을 형으로 모시던 때의 말투였다. 늙은 어머니가 죽어가며 한 당부 때문에 한왕을 섬기게 되기는 했으나 어딘가 겉도는 것 같은 데가 있던 왕릉의 눈길에서도 일순 감동하는 빛이 어렸다. 하지만 왕릉에게는 그 감동을 드러낼 겨를이 없었다.

“이놈 왕릉아, 네 감히 과인의 앞을 가로막으려 드느냐? 어서 유방을 내놓지 않으면 그 목을 베어 죽은 네 어미 곁에 나란히 묻어 주겠다.”

멀리서 왕릉을 알아본 패왕이 그렇게 외치며 더욱 힘차게 오추마를 박차 뛰쳐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패왕을 노려보는 왕릉의 두 눈에서도 불길이 철철 흘렀다. 날이 뱀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창[사모]을 움켜잡고 말배를 차며 맞받아 소리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항적(項籍), 이 모질고 독한 종놈아, 너 잘 만났다. 내 오늘 네 간을 씹어 돌아가신 어머님의 한을 풀어드릴 것이다!” 그러면서 한왕도 못 본 척하며 패왕 항우를 향해 달려 나갔다.

곧 벼락 치듯 하는 소리와 함께 패왕과 왕릉이 단기(單騎)로 부딪혔다. 왕릉은 원래 무용으로서는 패왕의 적수가 못되었으나, 워낙 골수에 맺힌 한이 깊어 그게 힘이 되었다. 패왕과 단둘이 맞붙어서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군의 전세가 기운 뒤여서 거기까지 뒤쫓아 온 초나라 장수가 패왕 하나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한군 사이에 뛰어들어 짐승 몰 듯 한군을 흩어 버린 종리매가 패왕을 뒤따라 한왕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항양과 정공(丁公)도 그 뒤를 따라왔다. 그 바람에 왕릉은 곧 외로운 처지로 내몰리고 한왕도 다시 위태롭게 되었다.

그때 왕릉의 부장(部將) 하나가 기마 여남은 기를 이끌고 달려와 소리쳤다.

“대왕, 신을 따라 오십시오. 진채가 멀지 않습니다.”

다급한 가운데도 그 목소리가 귀에 익어 힐끗 건너보니 그 부장은 바로 옹치(雍齒)였다. 옹치를 알아보자 한왕은 일순 숨이 멎는 듯했다. 목숨이 오락가락할 만큼 위급한 순간에도 옹치가 일생 저지른 밉살맞은 짓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풍읍(豊邑)을 들고 위나라에 항복한 뒤에 저지른 온갖 몹쓸 짓뿐만 아니라 그 이전 건달 시절에 속 썩이던 일들까지 눈앞에 선했다.

그 바람에 한왕은 고맙기는커녕 들고 있던 보검으로 단칼에 베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쩔쩔 맬 지경이었다. 하지만 옹치는 태연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굳어 있는 한왕 곁으로 다가와 여느 장수들과 다름없는 어조로 한 번 더 재촉했다.

“어서 신을 따르십시오. 형세가 몹시 위태롭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한왕의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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