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은 원래 신(神)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信이란 곧 神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란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信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노무현 정부의 3년이 낙제점을 받았다.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근본 요인은 국민의 믿음을 잃은 것이다. 그것도 ‘말’로써 잃었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여전히 낮지만 조금이나마 오른 때를 보면 그가 조용하던 때였다. 대통령이 ‘역(逆)발상’의 말을 쏟아낼 때면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지지도가 곤두박질쳤다.
묘한 것은 대통령이 조용할 만하면 ‘대통령 사람들’이 대신 나서 분탕질을 친다는 것이다. 조기숙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떠나면서도 조용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떠나면 청와대는 물론이고 나라가 조용해질 것 같아 한편으론 매우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편 나를 비판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일부 언론이 총량불변(總量不變)의 법칙에 따라 그 지면을 무엇으로 메울지 걱정이다”라고 덧붙였다.
시쳇말로 ‘너나 걱정하세요’다. ‘내가 떠나면…’의 저작권은 노 대통령에게 있다. 그는 작년 9월 중미와 유엔 순방길에 오르면서 배웅 나온 참모들에게 “대통령이 비행기 타고 나가니 열흘은 나라가 조용할 것”이라고 했다. 그걸 그의 ‘여전사(女戰士)’가 기막힌 화법(話法)인 양 끌어다 쓴 것이다.
도재이(道在邇)라고 했다.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말의 기준도 그러하다. 세상 사람들이 듣고 낯을 찡그리면 그 말은 ‘돼먹지 않은 말’이다. ‘돼먹지 않은 말’이 믿음을 낳을 수는 없다. ‘돼먹지 않은 말’이 권력의 입에서 자꾸 빠져나와서야 어찌 그들이 이끄는 정부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공자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즉 신뢰를 잃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했다.
열린우리당 김영춘 의원은 얼마 전 “대통령은 21세기에 살고 국민은 독재시대에 산다는 식의 방자한 말로 국민의 가슴을 후벼 판 홍보수석비서관을 당장 해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보수석비서관이 대통령과 국민 사이를 멀어지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거였다. 노 대통령이 김 의원의 말을 듣고 조 씨를 내보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조 씨가 대통령과 국민 사이를 떼어 놓았다는 김 의원의 말이 틀린 것은 분명하다. 홍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의 분신(分身)이다. 그의 말은 대통령의 생각을 담은 그릇에 불과하다.
지난해 여름 연정론(聯政論)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거세어지자 노 대통령은 민심에 대한 ‘과감한 거역(拒逆)’을 하겠다고 했다. 조 씨의 ‘대통령은 21세기, 국민은 독재시대’는 그래서 ‘과감한 거역’을 할 수밖에 없다는 대통령의 생각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국민과의 사이를 떼어 놓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의 말에서도 대통령의 생각은 드러난다. 이 실장은 언론이 경제위기론을 조장했다고 비난하면서 “우리 경제는 그동안의 축적된 내공을 바탕으로 위기 국면이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노 정부 3년 평가’ 경제 부문에서 8개 항목 모두에 낙제점을 매겼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한국 경제가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봉착해 있는데 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정책 대안을 모색하기에는 정부와 사회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우려했다.
권력과 민(民)의 생각이 이렇듯 엇박자여서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문제는 권력의 생각이 불변(不變)인 듯싶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정부에 대한 불신(不信)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남은 2년을 그나마 조용하게 지내려면 무엇보다 권력의 입들이 함부로 말하기를 삼가야 한다. 이제 뒤집기에는 그만 매달리고 역주행도 멈춰야 한다. 그러자면 말부터 반듯해져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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