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산물이 32 대 1로 참패했던 2003년 8월 필자는 토머스 허버드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났다. 도하개발어젠다(DDA)협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듣는 자리였다. 허버드 대사는 “한국만큼 시장개방으로 혜택 받은 나라는 드물다. 수출로 성장한 나라가 개방에 부정적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농산물 시장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농산물 개방은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교역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농가 소득 보전과 농민 보호는 필요하다”고 그는 밝혔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자유무역으로 큰 이익을 봤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추구하는 무역자유화가 진전될수록 한국은 수혜국이 될 것이다. 굳이 미국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유무역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세계 10대 수출국이면서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상대국은 3개 나라에 불과한 실정이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FTA 체결은 이런 답보 상태를 일거에 해소해 줄 것이다.
문제는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농업 부문이다. 농민들의 우려는 당연하다. 하지만 완전 개방을 전제로 한 32 대 1의 참패는 과장이다. 미국조차 자국의 메기 양식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베트남산 메기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었다. 이에 대해 허버드 대사는 “완벽한 개방이란 없다”고 해명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350만 농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 농민을 무시한 한미 FTA 체결은 불가능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쌀 관세 양허(concession·일정 수준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는 약속) 제외, 곡물류 50% 관세 인하, 기타 품목 관세 철폐 등을 전제로 한미 FTA의 영향을 분석했다. 국내 농업생산은 연간 2조 원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반면 제조업 생산은 단기에 연 3조3000억 원, 장기에 연 18조7000억 원이 증가한다. 농민의 피해를 보상하고, 농업의 활로를 열어 준다면 한미 FTA는 우리에게 남는 장사다.
더 나아가 한미 FTA는 ‘개방이냐 고립이냐’의 국가적 선택이다. 세계 전체로 국가 또는 지역 간에 이미 체결돼 발효 중인 FTA는 186건에 이른다. 한국은 WTO의 자유무역 일정을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FTA에 포위돼 고사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16일 “한미 FTA 협상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인식의 표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농업과 농민의 살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한미 FTA는 제2의 한일합방”이라며 반미(反美)를 선동하는 세력과 결연히 싸우고 다수의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한미 FTA 협상의 성공 여부는 노 대통령의 언행일치(言行一致)와 리더십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임규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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