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마음이 불편하다.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벽처럼 고전의 이미지는 버겁고 막막하다. 낯설고 어려운 한자어들과 옛 말투가 그득한 ‘열하일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책은 저 멀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열하일기’를 우리 곁으로 바짝 끌어다 앉힌다. 튀는 문체와 개념 모를 외국어의 남용을 덮고도 남을 만한 값어치다.
1780년, 청(靑)나라 황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수행원이었던 연암 박지원. 하룻밤에도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사투와 2800리에 이르는 여섯 달간의 대장정, 거기에 3년 동안의 각고 끝에 ‘열하일기’는 탄생한다.
중화 문명을 보는 연암의 유일한 잣대는 중국사람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눈에 가장 눈부시게 다가온 것은 화려한 궁성이나 호화찬란한 기념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을 끌어가는 벽돌과 수레, 가마 등이다. 그는 왜 생활의 이기(利器)에 집착할까? 조선의 현실이 그만큼 열악했던 까닭이다. 더욱이 “이 법을 배워 형제들의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을 강조한 북학파의 기본 노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중화주의에 찌든 사대부들에겐 이런 문명의 풍요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힘이 없어 고개를 숙이지만 청나라는 그저 야만의 오랑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랑캐의 문물을 소개하며 현실을 바로 보자는 주장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뒤엎으려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정조가 ‘열하일기’를 문체반정의 시발점으로 삼은 것도, 연암에게 반성문을 요구한 것도 모두 이런 맥락이다. 나아가 ‘열하일기’가 은유와 역설, 그리고 종종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일 법도 하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연암은 ‘호질’과 ‘허생전’을 통해 사대부들의 가식과 위선은 물론 명분에 지나지 않는 북벌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하나의 시점을 고집할 때 사물의 다양성과 이질성은 함몰될 수밖에 없다. 고정관념이라는 눈꺼풀을 벗고 이쪽과 저쪽을 있는 그대로 살필 때만 우리가 처한 문제점도 그 해법이 가능해진다. 그러기 위해 우리도 연암처럼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며 닫힌 곳에서도 길을 찾는 용기와 유연함을 지녀야 한다.
문재용 서울 오산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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