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716>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3월 16일 03시 05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이윽고 해가 지고 패왕 항우가 한신의 대군에게 에워싸인 채 두 번째로 맞는 밤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전날과 달랐다. 날이 저물기 바쁘게 무슨 잔치라도 벌이는지 패왕의 진채를 에워싼 한나라 진중(陣中) 모두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술 냄새,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초나라 진채로 날아들고, 왁자한 웃음소리와 흥겨운 노랫가락까지 들려왔다.

“간교한 한신이 거꾸로 우리의 야습을 유도하는구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패왕이 그렇게 말하고 초저녁부터 군막에 들어 쉬었다. 그런데 이경(二更) 무렵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떠들썩하게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군의 술판이 무르익었구나 싶었는데, 패왕이 가만히 귀기울여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점점 높아지는 노래는 모두 초가(楚歌)였다.

초가는 오유(吳X) 월음(越吟) 따위 같은 남방의 노래로 정의(情意)를 드러냄이 솔직하면서도 강렬하다. 특히 슬픔이나 괴로움을 노래할 때는 비장하면서도 애절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런데 괴이쩍게도 취한 한군이 모두 그 초가를 부르고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사방에서 들리는 초가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것도 목청 좋은 사졸이 비장하고 애절한 가사만 골라 부르는지 금세 초나라 진채는 한숨과 탄식에 잠겼다.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가 병졸로 뽑혀간 아들이 그리워 울고, 홀로 남겨진 젊은 아내가 싸우다 죽은 지아비를 슬피 불렀다. 아들 잃은 늙은 어버이와 아비 잃은 어린 자식이 걸식하며 떠돌고, 손발같이 자란 형제가 싸움터에 끌려나간 혈육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심경이 으스름 달빛 아래 구성진 가락으로 울려 퍼졌다.

굳기가 철석같은 패왕의 심지도 그런 고향의 노래에는 견뎌내지 못했다. 떠나온 고향과 잃어버린 혈육들을 떠올리며 심란해 하고 있는데, 그날 아침에 사졸들이 달아난 일을 알려준 그 사인(舍人)이 다시 패왕의 군막을 찾아와 말했다.

“대왕, 큰일 났습니다. 사졸들이 마구 진채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어서 막아야 합니다.”

그제야 패왕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초가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 놀라 탄식했다.

“한군이 이미 우리 초나라 땅을 다 차지하였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한군 속에 어찌 저리도 초나라 사람이 많을 수 있느냐!”

그리고는 그 사인을 보며 말했다.

“이미 마음이 변해 떠나는 것들을 억지로 붙잡아 무엇 하겠는가? 가고 싶은 자는 가게 버려두고, 나머지 장졸은 모두 과인의 군막 앞으로 모이게 하라.”

젊은 사인이 명을 받고 군막을 나가자 패왕이 다시 시중드는 군사를 불러 술상을 차려오게 하였다. 시중드는 군사가 술상을 차려 내왔을 때는 이미 삼경(三更)이었다. 패왕이 큰 잔으로 연거푸 석 잔을 마시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다시 시중드는 군사에게 시켰다.

“가서 우(虞)미인을 불러오너라.”

아마도 패왕은 그때 이미 해하의 진채에서 탈출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겹겹이 에워싼 한나라의 30만 대군을 잘해야 몇천 명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처절한 탈출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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